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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Mar 12. 2019

할머니를 보내드리면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할머니 장례를 치렀다. 아침 새벽같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모셨다. 아래의 글은 누군가의 마지막, 혹은 그 이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한 생각들이다.




생명이 떠난 사람의 몸은 처음 보았다. 생각보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슬플 뿐. 핏기라는 것은 붉지 않고 어두웠다. 할머니는 하얗지 않고 노랬다. 나이 탓인지 병 탓인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할머니 얼굴을 만지지 못했다. 시트에 싸인 손과 팔을 붙잡았다. 얇은 천 밑으로도 잔뜩 부은 몸이 느껴졌다. 한 번 몸에 차오른 물은 더이상 빠지지 않았다. 폐에 찬 물로 인한 산소포화도 저하. 할머니의 직접적 사인이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나지 않아서 “참 나쁜 며느리구나” 생각했지만 할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많이 울어서 고모와 아빠까지 울리고 말았다.


의외로 할머니를 보내며 가장 덜 운 사람은 둘째 고모였다. 하지만 둘째 고모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앓아누우셨다. 고모를 오래 동안 괴롭힌 편두통 탓이었다.


"어머님, 정말 감사했어요. 저 예뻐해주시고 나연이 동건이도 어머님이 예뻐해주셔서 잘 컸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이젠 편안히 쉬세요."


"할머니, 너무 감사해요. 어렸을 때부터 예뻐해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컸다고 자주 못가서 죄송해요. 사랑해요. 이제 편히 쉬세요."


차마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지 못했다. 무섭다는 표현보다는 생경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할머니와 다시 마주한 것은 입관식 때였다. 한결 편안해진 것 같은 할머니의 얼굴을 만졌다. 벌어져있던 입도 예쁘게 다무셨고 피부도 예쁘게 차오른 것 같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차고 보드라웠다.


가장 먼저 할머니에게 말을 건 사람은 큰고모였다. 할머니를 거의 껴안고 엎어져서 무너져내리듯 우셨다. 큰고모는 바위같은 사람이었다. 다정하지만 바위같은 사람. 큰고모는 무너지듯 우셨다.


큰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계셨다. 하늘색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 우셨다.


가장 먼저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빨갰다. 하고 싶은 말이 제일 많았을 것이다. 상주라서 말을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상주에게는 요구하는 것이 많다. 아빠는 막내아들이지만 형의 장례식에서도 거의 상주 노릇을 했고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상주 노릇을 하고 있다. 아빠의 어깨에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쌓였다.


산다는 건 더 많은 죽음을 겪는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빠는 많이 울고 있다.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눈이 빨갛다. 나는 같이 울어주다가도 웃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장례식장에서 가장 실없는 사람일까봐 무섭다. 장례식장에서 웃으면 예의에 어긋난걸까. 아직 이런 예의에 서투르다.




아빠의 친구들을 여럿 보았다. 너 서구 딸..? 전쟁나도 알아보겠다, 야!


나의 친구들을 닮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일 것이다. 언젠가 이윤서, 김민혁을 닮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형제 자매 말고.


엄마의 친구들도 다녀갔다. 다들 참 착한 사람 같았다. 여자가 오랜 친구를 갖기는 꽤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 엄마에게 의지할 집단 한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엄마에겐 이모들이 있다.


아빠 친구는 끝까지 “야, 너는, 길 가다가도 알아보겠다!”하며 웃고 갔다. 그렇게 닮았나.



영정사진이 디지털이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할머니가 너무 선명해서 의심했던 차다. 선명한 채도의 할머니와 달리 배경은 조금 푸른, 아주 옅은 회색이라서 할머니는 조금 튀어나와계신 것처럼도 보인다. 오래 바라보다 보면 조금 움직이시는 것도 같다. 조금 비뚤어진 입매를 올리며 웃으실 것 같다. 모든 건 그럴 것 같다는 상상이다.

내가 죽을 때 쯤에는 VR 홀로그램으로 영정사진을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그냥 좋은 인화지에 인쇄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장례식은 돈 드는 일과 서명하는 일의 연속이다. 장례식장을 쓰는 것도 돈이고 사람들을 쓰는 것도 식사 준비를 하는 것도 돈이다. 할머니를 병실에서 안치실로 모시는 것도, 그 때 쓰는 이불도, 그냥 모든 것이 돈이다. 생각보다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잘 죽는다는 것은 죽는 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죽은 이후에도 돈을 이렇게 많이 써야 살아갈 수 있었다.


인천에는 화장터가 한 곳 있다. 부평이다. 새로운 곳에 또 지으려면 무척 많은 반대를 무릅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몇십 년 동안 죽을 사람들은 태어날 사람보다 많다. 화장터가 있는 곳의 주소는 ‘평온로’다. 주소가 마음에 든다.




익숙해 질 때 쯤 다시 슬프다. 수십, 수백 명의 인사를 옆에서 함께 받으며 덜 슬퍼질 찰나에 새롭게 달려와서 황망한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이들을 보면 나도 함께 눈물이 난다. 나에게는 수십 번째 인사지만 저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다. 매번 눈물이 나는 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아빠는 모든 사람들의 손을 양 손 벌려, 조금은 과하게, 맞아주면서 눈물 고인 빨간 눈으로 웃으며 인사한다.


할머니의 장례식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오셨다. 구부정한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꿇고 두 번씩 절을 올렸다. 절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반절 인사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에 맞춰서 함께 인사해준다.




동생 친구들이 처음 장례식에 왔다. 눈치를 보며 타이밍을 재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 스무살 때보다 낫다. 스무살 때 나는 양말을 신는 걸 깜빡해서 맨발을 숨기느라 고생했다. 물론 숨기는 데 실패했다. 전공 과목 교수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동생 친구들은 장례식장이 처음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어서 놀랐다고 한다. 장례식장은 제일 치열하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서 그렇다. 혹은 그냥 사람들이 모인 자리여서 그렇다. 원래 사람들은 모여서 울고 웃고 떠든다. 장례식장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다 울고 웃다가 울고 기도하다가 울고 인사하다가 운다. 장례식장은 똑같은 일상 속에서 울음의 빈도가 더 잦아지는 곳이다.


19년 산 애들은 39년 산 사람들마냥 회포를 풀었다. 고3들은 이곳을 나가면 공부해야했다. 무슨 과감함인지 어른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참이슬도 한 병 깠다. 큰고모는 지나가며 “필요한 것 있으면 더 시켜”라고 하셨다. 동생은 찔려서 바로 병을 감췄다. 여섯 명이서 한 병을 홀짝홀짝 나눠마셨다. 김동건은 한 잔만에 빨개져서 딸기쥬스를 들이켰다. 애들은 반찬을 한 번 갈고 음료수 열 캔을 비운 뒤 세시간 만에 돌아갔다.


혼자 온 아이는 다리를 파들파들 떨었다. 아이들은 자기가 귀여운지 모를 때 귀엽다. 나는 파들파들 떠는 아이의 다리를 팔로 흉내내며 귀여워하다가 엄마의 팔꿈치로 옆구리를 맞았다.




제일 힘든 티를 내는 건 나다. 체력적으로. 왜 이렇게 지치고 몸이 무거운지 모르겠다. 다리가 자꾸 붓는다.


한낮에 상주 안쪽 방에서 쓰러져 자다가 어설프게 깨서 화장터에 간 이후 사람들의 끼니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 중 하나나는 끼니다. 발인 시간과 날씨를 걱정한 다음에는 모두의 끼니를 어떻게할지 고민했다. 먹고살아야지. 먹는 일은 “사는”일의 핵심에 맞닿아있다.




상조 팀장은 6시가 되면 칼같이 퇴근한다. 그 전까지는 장례식장에서 서류와 노트북을 들고 왔다갔다 한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닐텐데 일정한 톤을 잃지 않는다.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례식장 사무실의 사람은 우리에게 "상조 팀장님이 오실 거다"라고 했다. 모두에게 팀장 지위를 주는 건 아닐지 의심했다. 왠지 상조팀 직원이 오는 것보다 팀장이 오는 게 믿음직하다. 팀장은 우리의 상복을 원래 주는 것보다 여러 벌 줄 수 있도록 힘써보겠다며 본인의 능력을 살짝 과시했다. 사실 별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런 조금의 허세는 믿음을 준다. 그리고 상복도 여러 벌 준비해주었다. 사실 우리가 다 산 것이다.


화환 꽃 배치는 8자로 다 동일하다. 모두 같은 곳에서 해오는 건가 의심했지만 띠에 있는 무늬가 모두 다르다. 어떤 건 검정 배경에 금박 수고, 어떤 곳은 그냥 단순한 금 띠다. 뭐가 더 나은 건 없다.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꽃길로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잘 모르겠는 곳에서 할머니 성함 앞으로 꽃을 보냈다. 울산의 목사님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라며 나는 할머니의 로맨스를 상상했다. 아니었다. 이 쯤 되면 병이다.



장례식장에는 음식을 담당하시는 분이 네 분 계신다. 우리에게는 다소 과다 인원이다. 10시에 끝나면 같은 회사의 다른 장례식장 아주머니들과 모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다. 화장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신다. 퇴근하는 사람의 표정은 어디에서나 밝다. 계속 손님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식사를 챙기는 일. 무척 너그러워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눈물이 나지 않겠지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할머니 영정사진은 동생이 들었다. 할머니의 관은 조금 먼 친척까지 함께 6명의 남자들이 들었다. 아빠는 상주라서 관을 들지 않고 할머니 영정사진 뒤를 따랐다. 할머니 영정사진을 왜 동생이 들어야하는지 알 수 없었고 상주는 왜 남자만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할머니 마지막 길에 모두에게 시비를 걸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좋아서 하는 일같지 않았다 모두들. 당연하다.


할머니의 관을 리무진에 모시고 아빠, 동생, 엄마, 큰엄마, 그리고 큰사촌오빠가 리무진에 탔다. 상주 세 명과 엄마였다. 나는 혼자 버스에 탔다. 이어폰을 챙겨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만 혼자 남겨졌을 줄 알았는데 결혼한지 몇 년 안 된 새언니도 혼자 앉아있었다. 잠깐동안 같이 앉아야할지 고민했다. 괜한 오지랖같아 혼자 앉았다. 새언니는 할머니를 뵌 적도 거의 없는데 참 고생이란 생각이 들어서 더 챙겨주고 싶었지만 내 나이의 거의 2배인 사람을 내가 걱정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안녕하신가영의 2집 앨범을 들었다. '이 별만은 모르지 않게'. 먹먹하고 따뜻한 코맹맹이 소리가 좋았다. 세네 곡을 들으니 금방 화장터에 도착했다.


기차 대합실 같은 곳에서 할머니의 순서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 가족들 모두 함께 줄을 섰다. 할머니의 관을 화장터로 모셨다.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할머니의 나무 관을 넣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할머니는 화장터로 들어가신 것이다. 기관사같은 모자를 쓴 사람은 할머니를 안으로 모시고 할머니를 향해 경례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울었다. 옆에서 너무 곡을 해서 더 슬퍼지다가도 조금 시끄럽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많이 울었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라는 생각을 3일동안 몇 번 한지 모르겠다. 


끼니를 먹었다. 아빠는 할머니의 화장터 앞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찰나를 빼놓고 계속 그 앞에 앉아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마주보고 앉았다.


2시간이 지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큰 뼈 몇 개와 뼛가루들이 남아있었다. 분필처럼 하얀 색이었다. 이걸 내가 볼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그저 유골함으로 바로 연결해주는 줄 알았는데. 충격적인 광경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입이 크게 벌어졌다.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은 꽤 오래 쓴 것 같은 빗자루로 투박하게 생긴 쓰레받기 안에 할머니의 뼛조각과 뼛가루를 담았다. 너무 고왔다. 큰 뼈조각은 담다가도 바스라졌다. 다른 이들의 뼛가루도 섞이면 어쩌지. 마스크를 쓴 사람은 마지막으로 경례를 한 번 더붙이고 우리를 이동시켰다. 


도자기로 된 유골함을 흰 보자기에 싸주었다. 유골함을 싸는 동작이 너무 프로페셔널했다. 단단히 각을 잡고 예쁘게 매듭을 묶었다. 장례에서 가장 중요한 성의는 '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매듭은 3분도 되지 않아서 풀렸다. 유골함에 담긴 뼛가루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진공 처리를 해야했다. 청소기 호스 비슷한 걸 가지고 있던 사람은 항아리를 열어 그 중간에 갈색 투명 플라스틱 뚜껑을 덮고, 가운데 뚫린 작은 구멍으로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스티커로 작은 구멍을 막았다. 플라스틱 뚜껑에는 금색의 옛날 글씨체로 '프리미엄'이라고 써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유골함의 뚜껑에서도 우리는 프리미엄을 찾았다.


모든 부분이 대단히 산업화되어 있었다. 관련된 이들이 모두 능숙해보였다. 상조팀장님, 도우미 아주머니들, 입관을 돕던 사람들, 마지막 버스를 운전하던 기사님, 화장터에 있던 사람들 모두.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일이다. 매일 슬픈 사람들을 마주해야한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어서 적어놨어. 장례식을 이렇게 겪은 건 나한텐 새로운 일이니까.

누구나 겪는 일이기도 하지. 

동생이 의젓하게 말했다. 나는 메모장을 켜서 그 말을 적어놓았다. 누구나 겪는 일.



비가 올지 모른다고 했다. 비가 오면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묘 옆에 흙을 파서 유골함을 묻었다. 지금까지의 장례 과정에서 사람들이 모두 정장차림에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었다면 비석을 해오고 묫자리를 다듬어준 할아버지는 강화 큰아버지의 지인이었고, 작업인이었다.


작업인 할아버지는 바랜 카키색 작업복을 입고 거침없이 주저앉아 흙을 다듬었다. 수평을 몇 번이나 다듬고 다듬어서 비석을 뉘였다. 실리콘으로 마무리를 하면서 손을 조금 떠셨다. "알콜 중독 아니여? 손을 왜저렇게 떨어"라는 다른 할아버지의 농담 섞인 질책에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다른 면에 처리를 할 때에는 완벽한 직선의 실리콘을 보여주었다.


1924년 12월 20일 생

2019년 3월 8일 졸


생 다음은 사가 아니라 졸이었다. 이 생을 졸업했다라는 의미. 사(死)가 아닌 졸(卒)이어서 좋다.


묘석을 다듬고 조금 뻘쭘하게 서있던 우리는 계획에 없던 주기도문을 외우고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누구 하나 제대로 주기도문을 외는 이가 없었다. 사도신경과 섞이고 조사가 바뀌어 웅얼거렸다. 다소 우스운 마무리였다.


다들 자리를 정리할 때 묘석에 다가갔다. 다음 주에 가족들은 이 곳에 다시 오겠지만 나는 올 수 없었다. 묘석 위에 얕게 뿌려진 흙을 털어내며 할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진짜로, 마지막.




할머니를 찾아온 다른 할머니들은 자주 "고생만 하다 가셨네" 말씀하셨다. 고생만 하고 가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할머니가 행복하셨을 순간들에 내가 있었기를 바란다.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주님 때문에, 동건이 때문에, 아빠 때문에, 엄마 때문에, 그리고 할머니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할머니 자신 때문에 행복하셨을 순간들이 많았기를 바란다.


믿는 종교는 없지만 하늘나라 좋은 곳에 할머니 자리 하나 쯤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평생 감사한 기억 뿐이다.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는 분이다. 예뻐해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 더 자주 뵈러가지 못해서 죄송해요. 사랑하고 사랑해요. 가면 웃어주셔서 감사하고 끝까지 아빠에게 우리 가족에게 큰 위안이셨어요.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애써 빨리 믿지도 않을래요. 편히 쉬세요. 감사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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