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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Jun 25. 2018

유월 예찬

완벽한 계절, 유월아 가지마

계절이 바뀔 때면 으레 날씨에 대한 투정을 한다. 겨울에는 너무 춥다는 말, 여름에는 너무 덥다는 말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어색한 이웃과의 대화를 시작하기에 매우 적절한 소재가 된다. 문제는 그 소재가 다 떨어질 때인데, 그 때에는 날씨의 경향을 이야기하면 된다. '며칠 째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어요', 혹은 '그래도 모레에는 비가 온다니까 기온이 좀 떨어질 것 같다던데요' 같은. 대화가 엘리베이터가 아닌 카페에서 이루어진다면 조금 더 긴 대화가 필요하다. 계절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계절로  흘러간다.


나는 좋아하는 계절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좋아하는 계절, '최애' 계절은 없었다. 매사 긍정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나는 날씨에 대해 큰 불만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만큼 대단한 만족도 없었다. 각 계절의 특색이 있으니 어느 한 계절만 특히 좋다고 꼽는 것은 다른 계절에 대한 자만 같았다.  봄은 꽃이 피는 계절이고, 여름은 냉면과 잘 어울리고, 가을은 낙엽의 바스라짐과 긴팔 체크 셔츠가 좋고, 겨울은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계절이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해야 할 때면 (비밀번호 확인 질문이라든지. 선호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이게 본인 확인 질문이라니. 사람의 마음은 순식간에 변하는 걸)이렇게 하나하나 설명하기가 번거로워 내 생일이 있는 봄을 꼽았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한 선호가 생겼다. 나는 유월이 좋다.


유월의 푸르름! 뒷산이 있는 아파트에 사는 것은 행운이다.

유월은 완벽하다. 일단 6월이라고 쓰면서도 [육월]이 아닌 [유월]이라고 발음하는 것부터 좋다. 애써 입을 오므려야하는 [오월]과 달리 유월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내밀며 편안한 공기를 내뱉으면 된다. [이]와 [우]가 합쳐진 이중모음이라서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육]에서 자음 하나를 빼서 보다 편안하게 발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여유로워 좋다. 그래서 나는 6월을 [육월]이라 발음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유월이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발음에 대한 찬사가 억지스럽다고 여기는 사람 조차도 6월의 완벽한 날씨에는 동의할 것이다. 봄 내내 떠돌던 미세먼지도 대부분 가라앉았고, 낮에도 반팔 티셔츠와 끝이 찢어진 8부 청바지로 버틸 수 있었다. 아침이나 밤의 쓸쓸한 쌀쌀함에는 얇은 가디건이면 충분하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다른 외투와 달리 아무렇게나 가방 안에 구겨넣어도 금세 살아나는 여름 검정 가디건은 어딜 가나 필수다. 해가 진 뒤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된다. 살을 에는 인공의 찬바람 대신 서늘하고 상쾌한 밤공기가 서서히 밀려 들어온다.

낮이 길어지니 행복하군

올해 6월 21일은 하지였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으니 동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하지의 존재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동지가 있으면 하지가 있을텐데도. 하지는 일 년 중 낮이 제일 긴 날이다.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올해 6월 21일보다는 26일, 27일의 해가 1분 더 길었지만 올림픽 경기도 아니니 1분 차이 쯤은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하늘이 밝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대체 4시 반에 해가 졌던 암스테르담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 6월, 긴 낮에 대해 생각하게 된 이유는 SNS로 알게된 한 마케터 덕분이다. <마케터의 일>을 읽고 간단한 서평을 썼는데, 그 서평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 중 몇 명이 배달의민족 마케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신기했던 것은 배달의민족 마케터 모두가 '퍼블리셔스 테이블'에 참여한 독립출판 작가라는 것이다. 사원의 자기계발, 책을 쓰는 과정을 지원하는 회사라니.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마케터의 삶, 그들의 일상을 종종 보곤 했는데 그 중 한 분이 #메리하지스마스 라면서 하지에는 맥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정말 완벽한 조합이었다. 몇 번의 테스트 이후, 집에서 간단히 맥주 한 캔을 곁들이며 좋아하는 책을 읽고 선선한 밤공기를 마주하는 일은 6월 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녁의 취미가 되었다. 어제는 IPA를 마셨지만 역시나 집에서는 술술 넘어가는 라거, 그 중에서도 스텔라 아르투아가 최고다.


요즘 읽는 책, 직접 만든 토마토 살사 소스, 나쵸, 치즈, 그리고 맥주

지금은 이해완의 '그래서 우리'를 듣고 있다. 낯익은 목소리와 잔잔한 기타 선율이 어우러져 편안하다. 오늘은 아침 일찍 오전 일정을 소화하고 점심을 먹고 들어와 낮잠을 잤다. 2시간의 단잠이었다. 행복이란 이런걸까 서서히 일어나며 생각했다.


완벽한 날씨, 시원한 맥주, 상쾌한 밤공기. 나는 앞으로 계속 6월을 기다리며 살 것이다. 그러니 딱, 6월까지만 매일 밤 맥주를 마셔야지. 나오는 배를 숨을 흡, 들이쉬며 집어넣고 차가운 유리잔에 맥주를 따라야지.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나의 계절, 유월아 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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