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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Dec 29. 2017

8. 이별 앞으로

실감나지 않는 이 곳과의 작별 인사

나는 이별에 무척 서투른 사람이다.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하지 못해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고 그리워할것인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직접 전하는 말보다 편지가 낫지만, 편지에서도 나의 마음은 길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냥 나는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네가 그리울 것이다. 정말 많이 그리울 것이다. 이런 정도의 뚝뚝한 말밖에 늘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지를 길게 쓰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나의 마음도 저들 못지 않을텐데, 나도 그렇게 전하고 싶은데.


끝이 정해진 인연이 있었다.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을 서로 알고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끝이 보이기에 망설였던 것도 있었다. 그건 아직까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생각나는 걸 다 해 볼 걸. 그 인연을 마지막으로 나는 누군가와 영영 이별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암스테르담과의 작별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후회하지 않도록,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열심히 돌아다니고 눈에 담으려 노력했지만 추워진 날씨와 시도때도 없이 비를 흩뿌리는 날씨 덕에 밖으로 나가기를 망설인 날도 수 일이다. 늦게 일어나서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해를 보면 낮이 끝나버리니까 하루도 너무 짧았다. 마음 놓고 늦게 자고 마음 놓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온 도시는 노란 불빛으로 물들었고, 건너 편 건물 창 너머로는 천장까지 닿는 트리가 보인다. 스타벅스부터 집 앞 슈퍼까지 트리, 빨강, 초록색으로 가득하다. 밤이면 더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며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다.



얼마 전에는 눈도 많이 왔다. 잘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날씨 때문에 눈이 며칠 연속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하던데 일주일 전에는 10cm 가량 쌓이는 폭설이 왔었다. 시큰둥, 무덤덤의 대명사같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신이 나서 맨손으로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결국 빨개진 손을 전기장판과 이불 사이에 넣고 녹이고, 핸드크림으로 달래주며 꽤 오랜 시간을 주물러 주어야 했다. 방울토마토로 머리에 핀까지 꽂아준 그 눈사람은 채 20분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지만, 수십대의 자전거를 지키듯 의연하게 가로등 밑에 서있었던 나의 눈사람.




오늘은 암스테르담에 도착한지 정확히 4달이 지난 날이고, 드물게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좋아하는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카페로 걸어왔다. 뜬금없이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차고 비가 내렸지만 이젠 새롭지도 않다. 쓱 후드를 뒤집어쓰고 태연히 걸었다. 진짜 예쁘다. 건물들이 진짜 예뻐. 계속 감탄을 하며 걸어왔다.



주말이라 더 혼잡한 Munttoren을 지났다. 

차와 트램, 자전거, 사람이 모두 엇갈리며 지나가는 이 길을 처음 지날 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비가 오는 날 자전거를 타며 지나갔던 길이기도 했다. 청소차를 비켜간다고 애매하게 턱을 넘으려던 나는 비에 미끄러져 우당탕, 옆으로 넘어졌다. 나의 세 번째 자전거였고 첫 번째 사고였다. 순간 자전거에 온갖 정이 떨어져서 가던 길, 아무 주택 앞에 세워두고 볼일을 보러 갔었다. 그러나 볼일을 보면서도 내내 자전거가 신경쓰였고, 끝나고 그 장소를 찾지 못할까봐 떨렸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다행히 나는 자전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한 달쯤 지나서 나의 운전 미숙으로 세 번째 자전거는 운명을 다했지만.



Munttoren을 지나 Rembrandtplein에 도착했다.

처음 전세계에서 온 교환학생들과 조가 되어 암스테르담 곳곳을 찾아다닐 때 만났던 이 곳은 알고 보니 집에서 도보 20분 거리였다. 저녁 8시 반이 되어도 환했던 그 때, 어색하게 렘브란트의 야경 동상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던 그 때가 벌써 네 달 전이다. 패딩 위로 떨어진 빗방울들을 보며 나름 방수가 되는 재질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을 향해 사진을 찍고 있는 걸 발견했다.


무지개였다. 뿌리부터 선명히 보였다. 뒤쪽으로는 옅게 더 큰 무지개도 보였다. 초등학교 때 무지개를 쫓아 모험을 떠난 소년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저 정도의 거리라면, 이런 느낌이었다면 나도 무지개를 잡으러 떠났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에 내내 머물던 물기에 찬란히 맺힌 색색의 반원을 보며 희망, 행복, 그런 좋은 것들을 떠올렸다. 거의 매일이 흐리던 이 곳에서 나의 나날들도 결국 이렇게 좋은 것들로 마무리되어 기억될 테다. 



아직 완전한 작별 인사는 아니다. 나는 1월에 다시 이 곳을 찾을 것이고 그 때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할 것이다. Room에서 아이가 방 가구 하나하나에 인사를 하듯이 그렇게 다정하게 인사할 것이다. 매일 지나던 워털루플레인도 안녕, 경찰서 앞 무섭게 생긴 나무도 안녕. 하지만 지금과는 또 다른 느낌이리라.


4개월은 정말 짧은 시간이다. 짧았지만 잊지 못할 시간들. 모든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때로는 늘어지게 여유로웠고 때로는 뒤쳐지지 않으려 치열했었다. 한국의 집이 그리운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기 더 머물고 싶다. 그렇지만 아쉬울 때 떠나는 게 맞겠지. 책의 마지막 장을 읽지 않는다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는 이 곳에 굳이 끝까지 머물며 아쉬움이 모두 사라지고 권태로움과 지겨움이 남을 때까지 버티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나의 생활은 여기까지가 맞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타국에서의 오랜 생활, 이렇게 그 1막을 마무리한다. 2막이 될 나의 여행은 나날이 치열하겠지. 그 안에서 지치지 않고 무뎌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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