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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Mar 05. 2018

우리는 서로의 내년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리석은 허세 속에서 중심 잡기

부슬부슬 비가 흩뿌린다. 미스트같은 비다. 이런 비에는 우산을 쓰기가 애매하다. 마치 누가 계속 내 앞을 달리며 미스트를 뿌리는 느낌이다. 암스테르담을 생각나게 하는 비. 어제 우리 동네는 그런 비가 왔다.


우리 동네는 정말 변하지 않는다. 터가 좋지 않은 것인지 항상 바뀌던 왼쪽 상가 모퉁이를 제외하고는 통닭집도, 정육점도, 미용실도 모두 그 자리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보고 싶은 곳이라기보다는 항상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집에서 사는 것은 정확히 6년만이다. 기숙사 5년과 자취 1년을 거쳐 밖에서 혼자 사는 데에 지친 나는 집에 머물기로 했다. 게으른 생활을 좋아하고 지향하지만 반대편 나, 주로 새벽에 나타나는 그 '나'는 게으른 자신을 감당하지 못한다.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주5일 동네 빵집에서 판매 일을 한다.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밀가루를 많이 먹지도 않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러 멀리 나가기가 싫었고 복잡하게 머리쓰는 일도 싫어서 선택한 일이다. 걸어서 7분 거리의 빵집은 출퇴근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5살 때 한 번 이사를 했지만 옆 아파트로 왔을 뿐 나는 평생을 한 동네에 살았다. 하지만 중학교만 동네에서 나왔다. 그래서 나의 동네 친구들 혹은 얼굴이 익은 또래의 사람들은 중학교 때 알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빵집에 온다.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얼굴 알고 이름 알고 지나가다 가끔 인사하는 사이의 사람들.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할인 적립 카드를 묻는다.


중학교 때 알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를 의식한다. 나는 이 동네에 머물러있지 않다, 나는 좀 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메세지를 온몸으로 전하고 싶어한다. 멍청한 자기 허세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뭔가. 중학교 때는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던 내가, 사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


꽤 오랜 시간 외국에 나가 있다 돌아와서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즐겁게 순간순간을 보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노래를 들었다. 돌아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대화로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내년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


에픽하이의 노래 가사처럼 '참 진부한' 이야기다. 누구나 미래를 고민하니까. 하지만 그 진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때론 전부다. 학생으로 머무를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바닥에 떨어지면 다시 시계를 뒤집어 다음 장소로, 다음 시간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시계를 뒤집을 힘이 부족하다. 시계를 뒤집을 결단력, 힘, 용기, 그런 것들.


너는 꿈이 뭐야. 이런 질문은 이제 식상하다 못해 허무맹랑하다. 


꿈이 뭔지 알면, 당신이 뭘 해줄 수 있는데?


우리는 서로의 내년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완벽히 공감할 수도 없으니까. 각자의 상황은 모두 달라서 함부로 판단하여 해결책을 내놓을 수가 없다.


대신 우리는 그냥 서로를 묵묵히 응원하며 옆에 있어주기로 했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우리는 만나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맛있는 걸 먹을거야.
네가 엄청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널 먹여 살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자.


어리석은 허세가 쉽게 없어질 리 없다. 하지만 이젠 중심을 잡을 차례다. 어떻게 보이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만큼의 관심이 없으니까. 게으른 나와 그걸 참지 못하는 나 사이에서 이 갈등을 기록한다. 좀 더 편안한 말로 풀어낸다. 열심히 하루를 살고 서로를 달래며 화해시킨다. 그렇게 내실을 채우며 나는 이 동네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6개월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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