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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Mar 17. 2018

오늘의 하늘 기록하기

인천, 암스테르담, 프라하의 하늘

쨍하게 맑은,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너무 한참 기다려야했다. 돈이 아까운 것보다 추운 것이 더 컸다. 차로 10분이면 가는 거리지만 택시를 잡았다. 조수석에 앉아 익숙한 동네가 스쳐지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여기선 하늘이 너무 안보여요. 답답해. 빌딩들이 너무 높잖아."


택시 아저씨가 처음 한 말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늘이 좁은가? 서울 도심의 빌딩 사이도 아니고 인천의 동네 정도면 괜찮은데?


하하, 그런가요.


"그래서 나는 한국이 별로에요. 미국 가봤어요? 미국은 땅이 넓~고 건물들이 낮으니까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데 여기는 원. 답답해서 못다니겠어. 내가 작년에 미국 갔을 때..."


그 때 나는 이 이야기를 흘려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저씨의 미국 여행 이야기는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담기에는 부족했으리라. 예전에 갔었던 미국을 생각해보면 땅이 넓었던 기억은 있지만 하늘이 넓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이 대화는 쉽게 잊혀지는 줄 알았다.




암스테르담 내 방, 내 침대에 누우면 기울어진 벽에 달린 창이 있었다. 위아래로 긴 창의 밑부분을 앞으로 밀면 위쪽이 뒤로 밀려나오고 가운데가 중심이 되는 형식의 창문이었다. 맨 위층 지붕 바로 밑에 내 침대가 있었던 것이다. 기울어진 창문 덕에 비가 오는 날은 요란한 소리가 나거나 물기로 가득차서 모든 빛이 흐리게 번졌기 때문에 나는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지 않아도 비가 오는 지 알 수 있었다.


내 방 창문. 펩톤 오빠들 안녕?


눈을 뜨고 처음 보게 된 것은 항상 하늘과 나무 윗부분이었다. 대부분의 날은 회색빛으로 흐려서 아침 10시인지 오후 3시인지 알 수 없는 날들이었지만 가끔은 새파랗게 물들었을 때도 있었다. 노을이 질 때에는 분홍빛 보라빛으로 물들었다. 룸메이트와 일어나자마자 하는 이야기는 하늘에 대한 이야기였고 날씨에 대한 투정이었다.


"이게 날씨냐! 이게 날씨야!"


2017년 10월 2일 암스테르담


서울의 일기예보는 온통 해였다. 8이 해라면 2가 구름 혹은 비. 암스테르담은 9가 비 혹은 구름이었고 한 자리에서 간신히 버티던 해는 다음 날이면 자리를 옮겨 그 다음 날, 혹은 다음다음 날로 숨어버리곤 했다. 원래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날씨를 잘 확인하지 않는다지만 우리에게 암스테르담에 언제 해가 뜨는지는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암스테르담은 건물이 낮다. 특히 내가 살았던 시내 중심가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다. 해봐야 5층 정도의 건물들이 이어져있다. 가로로 동그라미가 세 개 들어가는 레고블럭들이 줄줄이 서있는 것처럼 창문이 세 개인 벽돌 건물들이 운하를 따라 쭉 서있다. 서울의 10분의 1도 안되는 인구 덕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래서 고개를 그렇게 높이 들지 않아도 항상 하늘이 가득차게 보였다. 자전거를 탈 때도 전방에 하늘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그제서야 그 때 택시아저씨의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아, 이렇게 하늘이 많이 보일 수도 있구나.



여행을 다니면서 그 나라의 첫인상도 하늘이었다.


음, 이 하늘은 명도가 높고 채도는 낮은 하늘색이네.

으음, 여긴 정말 푸르디 푸른 하늘색이네.

와, 여긴 정말 높고 깨끗한 하늘색이네.

음.. 오늘은 흐려서 하늘색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하늘은 대개 낮의 하늘이다. 밤의 하늘은 전부 깜깜해서 똑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억하는 밤하늘은 프라하 까를교에서 본 밤하늘이다.


한겨울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보랏빛이 돌았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분명 붉은 빛, 보랏빛으로 물들은 검정색이었다. 왜지, 가로등이 붉은 색이라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가로등은 노란 빛이었다. 어쩌면 붉은 지붕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에는 붉은 지붕이 많은걸. 아직까지 정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보랏빛 밤하늘을 보면서 '그래, 이게 프라하지' 생각했다.


프라하는 내게 가장 로맨틱한 도시 중 하나다.


사실 가보면 느낌이 그 날 그 날, 혹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날씨가 흐린 날은 그냥 그렇고, 날씨가 맑은 날은 붉은 지붕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다. 그렇지만 프라하의 올드 타운은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색을 바꾸고 예쁘게 살려낸 사진과는 조금 다르다. 동유럽 특유의 싸늘한 분위기도 있고 공사를 하는 곳도 꽤 많았다. 뜨르들로는 너무 많아서 명동 한복판 수많은 포장마차의 회오리감자를 보는 느낌이었고 딱히 특별한 맛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돌바닥을 걸어다니다가 독특한 모자를 쓴 건물들을 만나고 예쁜 공예품을 구경하다보면 만나는 까를교의 보랏빛 하늘, 프라하성에서 바라본 프라하 시내의 붉은 지붕과 보랏빛 하늘은 이 도시를 로맨틱으로 물들인다. 그래서인지 어느 해가 진 저녁 페트린 타워에서 수도원으로 걸어가던 길에서 뜬금없이 청혼을 떠올렸다. 노란 가로등 외에 사람이 없었고 여기서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웃긴 건, 같이 있던 언니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드물게 미세먼지도 없어서 약속 장소에서 꽤 되는 거리의 서점까지 걸어갔다. 좋은 음악과 함께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4%의 배터리는 지도 이외의 기능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아 자체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선곡은 지나가는 가게에서 나오는 노래. 다른 가게에서 다른 노래가 나오면 그 노래를 따라 이어불렀다. 그렇게 박보람의 애쓰지마요, 위너의 Really Really와 몇 곡을 부르다보니 서점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본 하늘은 참 파랬다. 큰 대로의 인도를 걸으면 앞 가운데는 뚫려있지만 양 옆은 벽에 막힌 듯 답답하다. 그래도 하늘을 보고 오늘은 이런 하늘이었구나, 생각한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방 창문을 보니 6시 반이 넘은 시각인데도 해가 지지 않고 하늘이 옅은 분홍색을 띄기 시작했었다. 고개를 좀 더 내밀고 위를 보니 잘못 뜯은 솜처럼 옅은 구름이 몇 겹쳐 있었다.


와. 하늘 진짜 예쁘다.


2018년 3월 17일 인천


한국 하늘을 찍어서 기억하려고 했던 건 여름휴가에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 방 창문에서 바라본 하늘을 찍었다. 잠시나마 방충망도 제끼고 하늘을 봤다. (깜빡하고 밥을 먹었는데 돌아와보니 방에 냉기가 가득해서 서둘러 문을 닫고 얇은 패딩을 입었다.)




2017년 12월 2일 암스테르담, gudak


암스테르담에서 살다가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와 나는 하늘을 보게 되었다. '힘이 들 땐, 다같이 하늘을 보자'라는 80년대 청춘드라마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날의 하늘을 기억하는 건 꽤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매일이 맑을 수는 없다. 흐린 날도 있고 미세먼지로 가득해서 환기를 시키지 못하는 날들이 이제는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바쁜 당신이 '오늘 하늘은 이러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오늘 하늘을 봤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쉬어갈 틈이 있었다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런 시간을 일부러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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