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온 기분
교통카드를 사고, 교통카드를 찍지 않아서 기차를 하나 보내고, 겨우겨우 긴장하며 중앙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전철로 약 30분 거리이니, 역시 여행을 많이 다니기 위해서는 암스테르담에 사는 게 맞았다. 옳은 선택!
밖으로 나오니 갑작스럽게 유럽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식상하지만, 그리고 알고 보니 이곳은 그리 ‘동화 같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동화 속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서야 내가 유럽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쨍한 날씨, 사방팔방 뻗어있는 트램 선, 유럽 풍 건물들, 그리고 평균 신장이 큰 백인들. 이민 가방, 21인치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큰 배낭,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으며 비행기 안에서 13시간 이상 절은 상태였지만 나는 나오자마자 사진을 찍었다. 지금 그 때 사진을 보면 코밖에 안 보인다. 눈은 부어서 작아졌고 코만 잔뜩 불어 있다. 게다가 햇빛을 받아 찡그린 상태. 아마 그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예쁜 것보다는 ‘내가 여기 왔다는 것’의 인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호스텔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꾸미고 나와서 다시 사진을 찍었는데 속눈썹이 바짝 올라선 것을 제외하니 이전과 똑같다. 어둠 속에서 2층 침대 아래층에 구겨진 채 어렵게 두들긴 화장품은 다 어디로?)
얼굴 상태가 어땠든, 표정이 어땠든 처음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설레던 마음은 그대로 기억난다. 엄마에게 ‘엄마, 나 진짜 유럽에 왔어 완전 동화같아ㅠㅠㅠ’라고 문자를 보낸 것까지. 이것이 ‘Centraal’ Station과의 첫 만남이었다. 중앙역은 영어로 치면 Central Station이지만 네덜란드어로 쓰면 Centraal Station이다. a가 두 개나 붙은 모음은 왠지 소독차가 지나갈 때 내는 소리처럼 브아아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대신 r 발음을 굴리지 말고 더 강하게 말아 내주어야 한다.
중앙역은 암스테르담의 시작이다. 붉은 벽돌의 신고딕-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8월에는 외부 공사를 하고 있었지만 두 달 쯤 후에는 완벽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앙역이 팔을 벌려 안을 수 있는 모양새로 앞쪽으로는 암스테르담이 펼쳐져있고, 뒤쪽으로는 바다와 북쪽 암스테르담(Amsterdam-Noord)으로 가는 페리가 운행한다. 이 페리는 공짜니, 암스테르담의 북쪽 지역이 궁금하거나 페리를 타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참고로 암스테르담 북쪽 지역은 도심에 비해서 생활수준이 낮지만 그래서 더욱 활발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점차 개발되고 있는 추세다. 한 달에 한 번 유럽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IJ-Hallen)이 열리기도 한다. 또한 암스테르담 시에서 저소득층에게 제공하는 집(Social housing)들도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페리를 타고 가다보면 보이는 형형색색의 건물이 바로 소셜 하우징이다. 이 모든 것을 수업에서 배울 수 있었다니! 사회학은 최고다. 암스테르담 대학교 사회학 수업 최고! Pamela 선생님 최고!
역에서는 지하철, 기차, 트램, 버스 등 모든 대중교통이 연결된다. 물론 자전거 주차장도 있다. 자전거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정말 많다. 앞 쪽의 많은 자전거에 놀라면 뒤쪽에서는 더 놀랄지도 모른다. 트램 정류장도 A와 B가 구분되어 있으니, 정류장에 쓰여 있는 트램 번호를 잘 파악해서 기다려야 한다. 버스는 중앙역에서 나와서 Prins Hendrikkade 방향(정면이다. 운하를 하나 지나서 큰 길을 건너야 한다)으로 걸어가서 타거나, 중앙역 뒤쪽으로 가서 탈 수 있다.
다시 8월 중순의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면, 내게 암스테르담은 초행길이었으며 나의 짐은 아주 많고 무거웠다. 거북이 목 빼듯이 이민가방을 늘려서 21인치 캐리어를 어떻게든 그 안에 우겨넣은 후였다. 택시는 바가지를 쓸까봐 두려웠고 버스는, 이 짐덩이를 가지고 올라타서 카드를 찍고 버스가 우당탕탕 움직일 동안 잡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찾아보니 숙소는 지하철역 앞에 있었다. 그렇다면 지하철.
M 표시를 향해 걸어갔고, 다행히도 기나긴 에스컬레이터와 평평한 바닥으로 큰 무리 없이 짐을 끌고 무사히 지하철에 도착했다. 러시아워도 아니었기 때문에 바위같은 짐을 가지고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답도 없이 큰 가방을 가지고 여행을 온 바보같은 아시안 여자애‘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행객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그 때는 여행객 '취급'이라고 생각했다. 뭐 크게 다르다고?) 왠지 나는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저 여기 거주허가증 있고–엄밀히 말하면 신청만 했고, 아직 결핵 검사를 못 받아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공부하러 온 사람이거든요? 저 여기 살거든요?’라는 자부심에 차서 여행객과는 다르다고 어필하고 싶었다. 물론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냥 있었지만.
처음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든, 혹은 암스테르담을 떠나든 구글맵 기준으로 숙소에서 중앙역까지 12분 이상 걸어야 한다는 통계가 나올 경우 걷지 않고 무슨 대중교통이든 이용하길 권장한다. 중앙역에서 꽤 먼 숙소가 많으니까 절대로, 함부로, 걷지 말자. 캐리어를 끌기에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매끄러운 길은 자전거 도로인데, 자칫 자전거 도로에서 캐리어를 끌다가는 높은 자전거를 탄 큰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지만 기분이 나쁜 말을 들을 수 있다.
걷지 말라는 조언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12월 말, 암스테르담을 떠나 5주에 걸친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아침 7시에 나와야 했다. 겨울의 암스테르담이 으레 그러하듯 미스트같은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구름 속을 걷는 것인지, 비가 오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그런 길 위에서 벗겨지는 털모자, 김이 서리는 안경, 20kg짜리 캐리어와 5kg짜리 배낭을 메고 걷다가 여행 전에 병이 날 뻔했다. (동행은 병이 났다.) 그러니, 자신의 짐을 과소평가하고 체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자.
암스테르담에 살며 중앙역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집에 왔다’는 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여행을 했던 6개월 간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집이 공간이기도 하지만 감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집’이라는 감정을 두고 돌아갈 곳을 만든다. 여행을 하면 즐거운 순간들, 설레는 순간들도 있지만 분명 지치는 순간이 온다. 동행과 뜻이 잘 맞지 않거나 그 도시에서 기분 나쁜 경험을 너무 많이 했거나, 그냥 기분이 나의 마음을 따라오지 않는 날. 그런 날이 있다. 나의 경우는 런던에서 그랬다. 런던에서 내내 생각한 것은 ‘아, 빨리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4박 5일 런던 여행을 마치고 중앙역에 내려서 익숙한 풍경을 마주하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의 중앙역에서 ‘집’을 느끼다니. 참 말도 안되지만 암스테르담은 고맙게도 6개월간 나의 집이 되어주었고 중앙역은 현관같은 의미였다. 긴장 풀어, 이제 집이란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했다면, 낯선 이여 암스테르담에 온 것을 환영한다. 부디 날씨의 신이 당신과 함께하길. 암스테르담 여행의 첫 목적지가 중앙역이기도 하지만, 중앙역은 암스테르담의 마지막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3.5유로를 내고 스키폴 공항에 가는 티켓을 산다면 이제 당분간 당신이 암스테르담에 올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작이자 여행의 끝. 암스테르담의 첫 인상이자 마지막 인상일 중앙역이 당신에게 어떤 이미지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건물의 모양을 잘 기억해두면, 암스테르담의 다른 어딘가에서도 이 모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조금 찔려서 덧붙이자면, 대부분의 추억에 취한 여행자가 그러하듯 중앙역에 대한 서술에는 미화한 감이 없지 않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면 입구에는 낡은 차림새의 배낭여행객이 많고, 서울의 지하철역처럼 깨끗하고 22세기의 것 같지도 않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여행객들, 특히 남자 여행객들은 혼자 여행하는 20대 아시안 여성에게는 존재만으로도 위협이 될 수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가까이 가면 대마 냄새가 진동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냄새를 맡고 ‘아, 암스테르담에 왔군!’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타이틀 사진 출처 : accessible travel Netherl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