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의 공원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괜히 코끝이 찡한걸 보니 난 아직도 사춘긴가봐 (그런가봐)
(중략)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야
오늘 같은 날 내 맘대로“
- 페퍼톤스 “New Hippie Generation”
암스테르담에 집을 두고 5개월, 그리고 1개월은 계속 떠돌며 14개국을 여행했다. 그 중에서도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은 공원이 많아 좋았다. 우리나라처럼 산책로와 놀이터 중심의 공원이 아니라 그냥 풀밭, 울타리, 나무, 호수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공원.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참 많았고 주말에는 작은 단체에서 와서 야유회를 하기도 했다. 한국에 도착하고 보니 정말 공원이 너무 없다. 이렇게 더운 것도 이해가 갈 정도다.
처음 머물렀던 암스테르담 호스텔에서 스태프에게 암스테르담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 어디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우스터파크를 추천했다. 직역하면 동쪽 공원이라는 뜻인데, 암스테르담 중심가 쪽에는 너무 사람이 붐비어서 정신이 없으니 밭이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면 제일 좋다고 했다. 그 땐 잠깐 “오오- 꼭 가볼게!”하고 잊어버렸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잃기가 좋다. 길을 잃기 쉽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을 때그리고 구글맵과 함께 적당히 길을 잃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 된다. 암스테르담 곳곳은 운하가 흐르고, 좁고 길쭉한 집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기 때문에 조용한 동네가 주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잃었던 어느 날에 우스터파크를 우연히 만났다. 지도에서 봤을 때보다 집에서 훨씬 가까웠고, 크기는 지레 짐작했던 것보다 컸다. 축척에 대한 개념이 전무함을 이렇게 들키고 있다. 나중을 기약하며 위치만 기억해뒀다.
그리고 날씨가 맑던 어느 주말 친구와 함께 공원에 갔다. 만반의 준비를 한 뒤였다. 가게에서 두 번째로 싼 로제 와인 한 병, 잡화점에서 산 플라스틱 와인잔, 양념된 올리브를 비롯한 안주와 돗자리, 그리고 왕좌의 게임이 담긴 노트북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처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7개 시즌을 일주일에 다 봤다. 이 순간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준비해간 작은 돗자리를 깔고 술을 마셨다. 날이 너무 밝아서 화면이 어두운 왕좌의 게임은 볼 수 없었다. 화면에 비치는 우리 얼굴만 보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암스테르담의 인상, 당시 내가 하고 있던 1달 페스코 베지테리언 프로젝트, 한국에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친구와 나는 어렴풋이 예술 비평을 하고 싶어 했다. 친구는 미술, 사진, 전시 쪽에 관심이 많았고 나는 음악, 공연에 관심이 많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우리는 비슷하고도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
푸른 풀밭 위 작은 돗자리에 몸을 구겨 누웠다. 군데군데 흘러가는 구름 뒤 파란 하늘, 나무 위로 반짝이는 햇살. 자연스럽게 페퍼톤스의 ‘뉴 히피 제너레이션’이 울려 펴진다. 세-쌍-은 넓꼬! 노래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 같아~ 이젠 익숙해져버린 대마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처음에 대마 냄새를 맡았을 때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 독한 담배 정도로 느껴졌다. 담배, 술, 책, 연인 등 공원에 함께한 것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우리만 강한 햇빛을 피해 그늘에 있었다. 사람들은 전부 햇볕을 받으며 떠들고 놀았다. 암스테르담은 가을, 겨울이 되면 비오는 날이 많고 일주일 내내 흐린 날들이 계속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받을 수 있을 때 햇볕을 많이 받고 비타민 D를 최대한 합성하는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사귄 더치(Dutch) 친구는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비타민D 합성이 잘 되지 않아서 가을겨울이 되면 약을 먹는다고 했다. 그러니 주말에 반짝하며 날이 빛나는 날은 햇볕을 받을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놓치지 않을 거에요.”
피크닉을 하러, 혹은 그냥 날씨가 좋아서 자전거를 타고 간 적도 있지만 일부러 공원까지 걸어 다녀오기도 했다. 걸어서는 30분 가량 걸리는 거리라서 가까운 산책 느낌은 아니었다. 다이어트 때문에 갔다.
자전거를 타다 보니 하루에 5000보 이상 걷는 날이 드물었고, 몇 분 자전거를 타는 것은 지방 연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야식으로 감자튀김을 해먹고 살찌는 나를 보며 스트레스도 올라가니, 대안은 운동이었다. 배가 고프면 슈퍼마켓에서 파는 간식용 당근을 먹었다. 생각보다 달고 수분이 많고 무엇보다도 저렴해서(한 봉지 1유로) 많이 먹었다.
미리 말하자면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장이 약한 편이라서 오래 뛰지도 못할뿐더러 애초에 몸이 힘든 건 딱 질색이다. 그러니 중충한 11월의 날씨에 30분을 걸어서 공원에 조깅을 하러 가는 것은 꽤 우울한 일이다. 대개는 자꾸 살이 찌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게으른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같은 것들이 쌓인 채로 집을 나선다.
30분 정도 걸어가면 저질 체력은 바닥난다. 이미 충분히 운동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공원을 조깅하기는커녕 슬슬 걷게 된다. 굴러다니는 낙엽도 보고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본다. 그러다 슬쩍 벤치에 자리 잡는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공원을 찾아 놀이기구를 움켜쥐려하고 테니스장에서는 ‘어잇, 어잇’하는 기합 소리가 들린다.
공원에서 나는 소리는 멀리 퍼져 있다. 개별의 소리가 이 공원의 넓이를 증명하듯 멀리서 들려온다. 이어폰을 빼면 공원의 소리가 조용히 깔린다. 그 소리들은 내게서 멀리 있다. 머리 위 나무에서는 바람 스치는 소리만 날 뿐이다. 내 쪽으로 다가오던 자전거는 어느 새 멀어지고, 멀리서 산책하던 강아지와 할아버지는 유독 천천히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머리를 비우고 앉아있다 보면 다이어트로 무거웠던 마음이 좀 산뜻해진다. 해가 쨍쨍한 날도 구름으로 흐린 날도 넓은 공원을 돌아다니면 그것대로 좋다. 산책 나온 개와 열심히 눈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고 넓고 평화로운 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다. 공원이 좋아 몇 바퀴 걷다 보면 다이어트 알게 뭐야, 건강하면 됐지. 그런 생각으로 집에 돌아오게 된다. 더 나중에 집을 구하면 큰 공원이 근처에 있으면 좋겠다. 오는 길에 먹는 생당근은 아까보다 맛있었다.
+ 부록. 유럽 여행에서 좋았던 공원
- 런던 하이드파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지나 걷다 보면 하이드 파크가 나온다. 암스테르담 우스터파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다. 꽤 시간을 잡고 가야한다.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왕족 다이애나 비를 추모하는 호수가 있다. 조깅하는 길을 걷다 보면 멀리 런던 아이도 보인다.
- 류블랴나 티볼리 파크
눈이 많이 온 다음 날에 갔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언덕에서 썰매 경주를 하고 있었다. 뛰어 들어가서 나도 한 자리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눈밭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엄마를 말리는 게 더 급했다. 엄마는 눈밭 한 가운데서 사진을 찍으려고 한 발 안으로 디뎠다가 종아리 중간까지 눈에 파묻혀서 양말을 적셨다. 태양빛 뜨거운 여름에도 엄마와 뛰어보고 싶다.
우스터파크
Oosterpark
Oosterpark, 1091 AC Amsterdam, 네덜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