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어떻게 만들까요, 을지로엔 왜 자꾸 사람이 모일까요?
올해 3월에 SNS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저 출판 할 거에요! 독립출판이든 기획 출판이든 꼭 해내고 말겁니다. 지켜봐주세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며 꼭 사겠다고 약속했지만 게으른 저자 때문에 그들은 점점 지쳐갔고 관심도도(좋아요도 댓글도) 점점 떨어졌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지켜봐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아직 조금 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아직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고, 독립출판도 기획출판도 눈치만 보며 틈틈이 정보를 쌓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CA 매거진은 제게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기획이었을 밖에요.
게다가 지금은 대학교 시험기간입니다. 7번째 시험기간인데도 여전히 격렬히 딴짓을 하고 싶네요. 그런데 페이스북은 이미 다 봤고 인스타그램은 '2일동안 올라온 게시물을 모두 확인하셨습니다'라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답은 잡지입니다. 그래서 시작하는 격렬한 딴짓 잡지 리뷰. 게다가 내용도 좋으니까요.
커버에서 담고 있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책 디자인의 구조'와 '을지로운 창작 생활'. 물론 이 두 꼭지를 제외하고도 매력적인 일러스트 작품들과 관련 기업들의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의 작품들이었고, 디자인 트렌드에는 어떤 새로운 기획들이 나오는지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을지로운 창작 생활
힙, 인싸, 쿨, 이런 것들이 유행이 된 시대에서 을지로는 이 유행의 최첨단에 서있는 듯 합니다. 대기업에서도 1020을 타겟팅하며 을지로를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본디 힙하고 쿨함이란 남들과는 다름을 자랑할 수 있어야하며, 그것이 어딘가 갸우뚱하게 느껴지더라도 '이게 요즘 유행이래'라는 말로 납득 가능해야합니다. 을지로가 그렇습니다. 빈티지 폭풍이 SNS를 휩쓸면서 간판이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을지로 상가 2층 카페 같은 곳들이 '힙한 곳'으로 떠올랐습니다. 빈티지 잔을 선택해서 음료를 마시는, 용기를 위해 내용물에 돈을 지불하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어차피 용기는 반납하는데도 말이에요.)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고 유행을 따르는 가게들이 삼삼오오 나타나는 것은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입니다. 홍대가 그렇게 변했고 서울의 각종 '-리단길'들이 그렇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을지로는? 을지로도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독특한 삶의 문화가 있습니다. 무엇이 독특할까 생각해봤습니다.
그곳은 정제되지 않은, 거친 삶의 현장입니다. '미생'에서는 사무실 실내화도 현장의 전투화라고 표현했으니, 이를 생각해보면 어딘들 현장이 아니냐만은, 을지로는 홍대나 경리단길처럼 주말이 더 분주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의 생산 활동을 지속하는 '평일 삶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작가들(심지어 스타트업의 마케터도)이 최근 을지로에 작업실을 열었습니다. 대체, 회사도 있는 사람들이 왜 작업실을 연 것이며 그것은 왜 하필 을지로였을까요? 을지로는 어떤 곳일까요? 이 모든 궁금증을 안고 '을지로운 창작생활'을 읽었습니다. 잡지를 만들 당시의 에디터들은 몰랐겠지만 그 당시 '을지로운 창작생활'은 이 궁금증을 해결해야한다는, 무척 큰 부담을 안고 있었던 셈입니다.
요약하자면 을지로는 인쇄 출판 창작업계의 실리콘밸리 같은 곳입니다. 유사 산업군의 기업들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은 기술 및 지식들이 서로 조금씩 공유되는 Spill-over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낙수까지는 아니고 졸졸 시냇물 정도니까 저렇게 이름을 붙인 걸까요? 유사 연관 산업들이 한 군데 모여있기 때문에 일처리가 보다 간편하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에 따라 크게 발품을 팔 필요도 없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죠.
한 편으로는 동묘시장과 비슷하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서울의 옛날 모습이 남아 있고 기존 상인들의 연령대도 높은 편이라서 해당 산업의 베테랑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쇄소 사장님, 각종 끈이 전부 모여있는 대형 실 집. 소비자보다는 제작자에게 더 가까이 있던 곳들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곳, 그래서 더욱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곳들이 모여있습니다.
을지로는 임대료가 저렴하다고 합니다. 본디(?) 창작자들은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모이게 되는데요, 지금은 그 장소가 을지로 주변인 겁니다. 문래에 예술가들이 모인다면 을지로에는 저마다의 야심찬 꿍꿍이를 가진 창작자들이 모이는 분위기입니다. 이들은 강남의 위워크(WeWork, 공유스페이스 사무실)처럼 번듯하지는 않지만, 텅 빈 작업실에 각자 책상 하나씩 놓고 자신들만의 분위기를 꾸며갑니다.
이는 독립출판이 발달하고 '퇴사'가 하나의 키워드였던 작년의 영향으로 자신만의 소규모 일들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에 따른 공간 이용의 변화로 보입니다. 이런 공유 작업공간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게는 무척 매력적인 일로 보였습니다. 글 작업도, 공부도, 하고 싶은 작은 사업들도 여기서 준비할 수 있을테니까요.
책 디자인의 구조
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독립출판을 준비해보면서 인디자인을 써야한다, 폰트는 정부에서 추천하는 게 있다더라, 등등 많은 이야기를 엿들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처음입니다. 독립출판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라면 어떻게든 CA 240호를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추천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질의 정보들이 담겨 있습니다.
각자의 경험이 담긴 표지 디자이너들의 이야기까지는 즐겁게 읽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물음표가 잔뜩 뜨기 시작했습니다. 명조.. 윤명조..? 중명조..? 중학교 교지부 출신으로 나름대로 폰트에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말들인가요.. 게다가 팬그램이라는 폰트 정렬 검증 방식을 소개하며,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가 가로 획이 하나밖에 없고 균형이 치우쳐 있다며 '한아름 꽃빛 옹이 왕 무늬 셋'이라는 기괴한 문장을 소개하면서 더욱 저의 마음을 초조하고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나만 못.. 알아듣나..?
하지만 잘 보면 무척 학문적인 얘기이면서 신기한 얘깁니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 음소가 총 24개이고 이를 통해서 결합할 수 있는 음절은 11,172자입니다. 각기 다르게 생긴 글자들의 균형을 맞추어 독자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저런 단어의 조합을 만들고 모양을 분석하며 폰트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 세상에 쉬운 일은 정말 한 가지도 없군요. 그 외에도 그리드(줄눈금) 그리기, 레이아웃, 판형 등 책 디자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꼭지는 팬그램에 사용하는 배경지를 바탕에 깔았습니다. CA의 센스가 빛나는 부분입니다. [책 디자인의 구조] 부분을 읽으며 책도 시각예술임을 느낍니다. 저는 책이 '작가'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글을 잘 쓰면 되는 것이라고요. 물론 그건 책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속합니다. 그릇이 아무리 예뻐도 음식이 맛이 없다면 그건 결코 좋은 음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음식은 멋진 그릇에 담겨야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고 더 즐겁게 읽힙니다. 한껏 감성적인 글인데 굴림체라든지, 한껏 딱딱한 글인데 손글씨체라든지 하면 이상하잖아요. 독자들에게 작가의 글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은 '책'이라는 시각예술을 분석하고 만들어냅니다. (책을 내는 게 더 두려워져 버렸어요.)
격렬한 딴짓을 마치며
저는 원래 잡지를 좋아합니다. 식당 가서 메뉴판 뒤의 '식당의 역사' 읽고, 어딘가에 가면 카탈로그 열심히 읽는 사람들 있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라서 뭔가를 읽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잡지는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특히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 새로운 최애 잡지를 발견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CA! 아직 CA가 무엇의 약자인지도 모르지만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끝나면 더 자세히 하나하나 읽어볼 생각입니다. '디자인'에는 완전히 문외한이라서 어떻게하지, 너무 낯선 내용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예쁜 사진과 그림에 멋진 글들까지 있어서 더욱 즐거웠던 CA 2018 SEP/OCT '책 디자인의 구조 / 을지로운 창작생활' 편. 격렬한 딴짓의 대상으로 강력히 추천합니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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