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리히터_촛불
매일 밤 하루를 마무리하며 일기를 쓴다. 이 일기는 그 날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기록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촛불을 켠다. 눈을 감으면 하루 동안 있었던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친다. 하루 중 기억나는 장면은 늘 있게 마련이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장면에서,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때, 나는 흔들리며 휘청거리며 생의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많이 넘어져 보았기에 이제는 새롭게 선택한다. 나다운 중심을 잡으며 나답게 값지게 살고 싶어 일기를 쓴다.
일기 형식이 좀 특별하다. 하루를 되짚으며 시간을 내어 소화하고 성찰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소환하여 기록한다. 그 장면에서 느꼈던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름을 곱게 붙여준다. 피곤한, 찜찜한, 열 받는, 고마운, 기분이 좋은 등등. 감정은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특별한 일기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감정은 욕구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이름 붙인 나의 감정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욕구도 하나씩 찾아본다. 내가 편안하게 쉬고 싶구나, 내가 존중받고 싶구나, 내가 배려받고 소통하고 싶었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또렷하게 찾다 보면, 나의 존재가 품고 있는 고유한 무늬와 결을 발견한다. 나의 감정과 욕구는 나다움을 품고 있다. 나답게 발휘했던 내면의 힘도 찾아보고 이 또한 이름을 붙여준다. 알아차림, 용기와 진실, 사랑, 존중, 균형. 내가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이렇게나 많다니, 든든해진다. 마지막으로, 나의 존재에게 격려한다. 애쓰고 수고했어. 나를 토닥여주고 안아준다.
가슴 미어지게 평범했던 나의 하루가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기에 오늘도 나는 조금 특별한 일기를 쓴다. 나에게 허락된, 소중하고 귀한 순간 순간을 맛보고 누리고 싶다. 하루를 갈무리하며 나의 존재를 만나는 20분, 촛불을 켜고 존재를 환하게 밝힌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