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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13. 2023

0. 23년치 사계절이 조각났다




짙은 남색 물에 빠져 심연을 헤멘다면 이런 느낌일까.



친구가 무슨 일이 있냐는 의미로 “오늘은 왜 아팠냐”고 물었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힘드니 ‘병’이 맞는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슬픈 날은 슬프고, 힘든 날은 힘드니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신민아가 우울증 환자 역을 연기하는 것을 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간단한 행동조차 감기몸살을 앓는 이처럼 버겁고 느릿하며,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뒤에는 숨을 두어 번 몰아쉬어야 하고,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몸에서는 식은땀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 분간할 집중력조차 없어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며, 무엇부터 하는 것이 내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지 찾아내고 실현해낼 의지 따위는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증상들에 더해 가끔은 토할 듯이 오열하는, 그 모든 장면이 나의 현재와 같았다.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쓸데없이 분비되면 근육통도 스트레스성으로 생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정상보다 부족하면 행복감을 물리적으로 잘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호르몬 체계가 어느 순간부터 제 기능을 균형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상신호를 나는 그저 꾀병인 줄 알았고, 내 안의 게으름이 나를 속이는 것인 줄 알았다. 정작 내가 속고 있던 것은 "난 괜찮고 그래야만 한다"는 이유 모를 강박이었음에도 말이다.


나는 현대사회에 ‘좋은 노동력’이었으나, 스스로에게 ‘좋은 생명체’는 아니었다. 어떠한 감정을 느껴 볼 시간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무언가 일할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피로를 인지하고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하고 더 바쁜 스케줄을 만들어 피곤을 덮는 게 익숙했다. 무섭게 달리는 오토바이가 바로 옆을 지나쳐도 무심했을 때, 나는 내가 정말 어딘가 고장났다고 느꼈다. 당장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각종 아쉬움을 표하며 답하는 이들의 영상을 보면서도 공감하지 못했다. 내게는 삶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생명체라면 자기생존을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동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임에도 난 그렇지 않다, 아니 그렇지 못하다, 라는 자각을 시작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휴학을 하면 재학 중인 대학교 심리상담센터에서 무료 검사를 받을 수 없는 줄 알고, 휴학 직전에 검사나 한 번 받아 보자 싶었다. 검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결과가 너무 멀쩡한 상태로 나와서 민망해지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며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며칠 뒤의 나를 기다린 것은, 중증도로 따지면 상위 5% 안에 드니 상담이든 약이든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꽤 심각한 결과였다. 애써 외면하던 존재와 눈을 마주친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당시 나는 쳇바퀴 같던 기존의 환경을 뒤엎어버리고 싶다는 답답함에 교환학생을 신청해 둔 상태였다. 검사 결과를 받은 날은 출국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는데, 가족에게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릴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결국 혼자 독일의 웹사이트들을 마구 뒤지며 한국계 정신과 의사와 심리상담사를 찾기 시작했다. 독일어나 영어로 내 증상과 삶의 궤적을 털어놓을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에게 나의 짙은 푸른빛이 물들지 않기를 바랐기에, 아플 때 아프다고 잘 말하지 않았다. 나를 365일 내내 관찰하는 이가 없는 이상 아플 때, 딱 그 시기에 안부 인사를 선물받는 것은 확률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평소에 괜찮다는 말만 달고 살았더니, 당연히도 아플 때 아프냐는 말을 제때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럴 때마다 우울을 환기해 줄 무언가가 없는 나로서는 그런 고립을 자처한 이전의 나를 책망하곤 했다. 그럼에도 각자의 세상살이를 하는 데 다들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진심으로 응원하기에 나는 차마 “나 좀 어떻게든 꺼내달라”는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아픈 이유를 곱씹어 생각하고 아프다는 사실 자체를 스스로 인정해 줄수록, 아프다는 사실을 주위에 솔직하고 자세히 털어놓을수록 나는 회복되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 크고 작은 온기로 기능한 순간들을 되짚으며 내가 무엇에서 삶의 원동력을 찾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이 사람들과 같이 따뜻한 날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주변인들을 더 믿게 되었다. 타인의 진심에 대한 신뢰가 커졌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커졌다.


그럼에도 회복의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웃던 날과 울던 날이 깊숙한 서랍 속 뒤섞여 표정을 잃은 상태에서, 그것들의 입꼬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진정으로 어려웠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며 축적된 아픔들이 나의 우울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 기억들을 헤집고 다시 정렬할 용기가 없었다. 어린 날의 어린 나를 호명하는 것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나는 굳이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 위로 올려 입술 끝에 놓고 그것의 이름을 불러줄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가 어렸고 어디까지가 여렸는지, 사실은 어디까지 어릴 수 있었고 어디까지가 여릴 수 있었는지, 진실은 어디까지 어리지 않은 척을 하였고 어디까지 여리지 않은 척에 성공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도 온전히 풀지 못한 평생의 숙제다. 어찌 되었건 간에, 심해와 같이 어둡고 차가운 낯빛을 감추기 위해 ‘그 시절의 나’가 스케치북을 뒤덮어 칠한 것은 바다를 감싸 안는 노을빛이 아니라, 결국 색채를 상실한 채 정지해 있던 자갈들의 빛이었다.


그 차가운 낯빛의 어린 나를 안아주려는 시도가 시작된 장소가 바로 독일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함께, 다시 그곳으로 가보려 한다. 다만, 여러분의 입장에서 내 상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아 출국 직전까지 머물렀던 도시인 ‘서울’에서의 이야기부터 들려드릴 계획이다. 여러분께도 ‘심연 속 자신’과 마주할 시간과 장소가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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