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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봄-1. [독일] 베를린


괴팅겐에 정착한 뒤 처음으로 어딘가로 나가 본 곳이 베를린이었다. 여행은 도착이 아닌 출발에서부터 시작한다. 두근거림의 시작이기 떄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한참 전이더라도 기차 안에서의 기분은 이미 여행지였다. 베를린으로 가는 길이 그랬다.



베를린은 '기억의 도시'였다. 곳곳이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추모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꽃 한 송이를 올려두고 갔고, 누군가는 조형물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무언가 일어났던 일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그 일이 아픔이라면 우리는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

'기억'에 관해 생각했다. 나는 어떠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드는 관심을 느낄 때, 해당 사건의 직접적 관련자가 아님에도 마음 한 켠이 너무 아려오던 적이 있었다. 나는 아픈 사건들을 잘 기억한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연히 지하철을 탄 채 구의역을 지나다, 스크린도어가 닫히며 '구의역'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는 동시에 어지러워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내게 큰 고민으로 이어졌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끄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나는 엄마를 '자기만의 입장에 몰두한 방관자'라고 여겼고, 엄마처럼 되기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가족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나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사회란 취약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했고, 나의 취약함도 누군가를 통해 감싸안아졌으면 하는 희망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을 관두려는 내 모습이 엄마와 겹쳐 보였고, 내가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과 반대된다고 느껴졌다. 나는 방관자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내 일상과 내 일을 해나가면서 여러 이슈들에 계속 관심을 가지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항상 아쉬웠고, 항상 슬펐다.



그런데 베를린에서는 '기억'이 쉬웠다. 길을 걷다가도 그 곳에서 안타까운 마지막을 맞이한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이름이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공원과 길가를 걷다 보면, 잊을 만할 때마다 하나씩 베를린의 아픈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나타나곤 했다.



베를린 장벽의 조각을 기념품으로 만들기도 했고, 벽화를 엽서로 만들기도 했다. 



'기억'은 확장 가능성을 지닌다. 베를린 장벽에 관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 위에 걸린 우크라이나 관련 현수막도, 동서독 분단에 관한 박물관에 있던 한국의 옛 사진도 '확장'이었다.

나는 기억의 확장 가능성이 '연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공감하고, 머리를 맞대고, 함께 치유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 그 모든 행위가 연대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적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도, 양심이 아주 뛰어난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공동체적 가치를 열망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고민해 보았는데, 답은 꽤나 '이기적'인 이유였다.

나는 아프다. 나의 아픔을 홀로 견디기 싫다. 누군가와 함께 치유하고 싶고, 누군가의 어깨를 빌리고 싶고, 누군가의 손수건을 빌려 내 눈물을 닦고 싶다. 내게 등을 돌리고 내 고통을 무시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다. 그런 간단한 이유였다. 내가 싫어하는 인간상이 되기 싫다는 것,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나부터 먼저 실천하자는 것. 그게 내가 '기억'하는 베를린에서 '공동체'라는 따뜻함을 느낀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베를린을 사랑했다.



베를린 건물들에는 벽화가 많다. 그 그림들은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



칙칙한 공사장을 노란 하트로 물들이거나, 공사장을 가린 벽면을 통해 멋드러진 건물의 완성을 기대하게끔 하거나, 건물 외벽의 남는 공간에서 헤엄치는 고래를 만나게 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일 테다. 형제의 키스를 포함해 자유, 기억, 치유 등을 주제로 한 벽화가 가득했다. 공동체와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가는 길에 마주친 강변 공원에 앉아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강물에 비치는 햇살의 반짝임도 좋아했다. 버스킹 공연의 노랫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기를 좋아했다.



그래,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장면들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이전의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을 느끼는 것도, 지금의 사람들이 뱉는 숨소리를 느끼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독일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렇게 교환학생도 오게 되었지, 하고 다시 생각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베를린의 벼룩시장들을 참 좋아했다. 박물관 섬(박물관이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을 일컫는데, 지형적으로 섬과 같은 지역이라 그렇게 불린다)을 지나다 지역의 예술가들이 각자 부스를 열고 모여 있는 곳을 보았다. 각자의 예술을 내놓은 모습이 참 풍성했다. 나라는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 특히 각자가 다채롭게 살아가는 것에 삶의 원동력과 희망을 얻는다고 느꼈다.



나는 서울에 온 지금, 가방에 여유 공간이 있다면 동전을 들고 다닌다. 필수적인 이유는 없다. 무엇을 살 때 대부분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을 소지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다니는 곳에 동전이 따라다니는 이유를 굳이 한 가지 정도 찾아보자면, 카세트테이프와 청바지 조각을 리폼해 만든 지갑을 샀는데 그 속을 카드로만 채우기는 왜인지 모르게 허전하기 때문이다. 안 맞는 옷을 입힌 느낌.

이 지갑이 꽤 마음에 드는 이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인 베를린에서 샀다는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베를린같은 물건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어찌 보면 투박하고 소박해서 평범해 보이는데, 나름대로의 재미와 개성으로 그 평범함을 한번 '뒤틀어 꼬아 놓은' 것들이 많아서, 그런 자유로운 이단아들이 모여 다채롭게 빛나는 그런 도시여서. 이 지갑도 그런 느낌이랄까. 카세트테이프와 청바지의 조합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베를린의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에서 보고 반해버려서 바로 샀다.

새장을 나오려는 새의 그림이 그려진 목걸이도 하나 샀다. 내가 스스로를 가두던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꿈꾸며.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각종 물건들을 구경하다 괴팅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언젠가 이 도시에 반드시 다시 오리라고.


여기까지가 나의 첫 베를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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