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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봄-2.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비야


비눗방울과 오렌지나무.

나의 스페인을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고 그 두 단어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나는 어디가 고장나서 그 추상적 단어를 손에 쥐어보지 못하는 것만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비눗방울을 부는 아이들이, 오렌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행복이라는 그 흐릿한 무언가를 품에 꼭 안고 미소를 지으며 살 맛이 난다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지구에 행복이 꼭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 곁에 없다고 영영 그게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게 누군가의 곁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은 가지지 못하더라도, 나는 행복이란 게 존재한다는 믿음만이라도 붙들고 싶다고. 


푸른빛에 잠겨 있는 듯한 우울증 환자에게 투명한 비눗방울과 주황빛 오렌지는 행복에 관한 상념에 잠기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대조되어 슬프지는 않았고, 오히려 기대감 비슷한 무언가로 작용했다. 


나도 좀 밝은 색채가 마음에 물드는 것 같아, 하고 느끼면서.     



바르셀로나의 거리에는 벤치가 많았다. 벤치에는 웃음소리들이 앉아 있는 듯했다. 벤치 주변의 분위기 때문이이었다. 장난기 많아 보이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사람, 과일 가게에서 쾌활하게 대화하는 주인과 손님. 햇볕이 좋았고 가로수가 많았으며 건물 벽의 색감은 쨍했다.

골목길 사이사이에도, 큰 길에도 항상 벤치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를 가야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저 햇볕 좋을 때 길에 나오기만 해도 앉아서 쉴 곳이 있다는 것이니까. 사회가 더 연결되려면, 연결될 만한 공공의 공간이 그만큼 확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외관에 주목하며 바르셀로나 곳곳을 돌아다닌 이유는 가우디 때문이었다. 유명 건축가인 그가 남긴 작품이 바르셀로나에 굉장히 많았는데, 건축적 지식이 없는 내가 그것들을 둘러보며 느낀 것은 '열정'이었다. 자연의 재현을 원했다던 가우디는 곡선의 활용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인 것 같았다. 문 손잡이도, 계단도, 천장과 벽이 이어지는 부분까지도 곡선 형태로 둥근 느낌을 주었다.

누군가의 열정 어린 성취를 목격했을 때 그 과정을 상상해보곤 한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다면 그걸 보면서 제작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걸 표현하기 위해 어떤 시도들을 했는지 자세히 관찰하려 한다. 어떤 좋은 결과가 나왔다면 그 기저에 깔린 노력의 시간들 속에 그 사람이 그 기간 동안 뭐 때문에 고민이었겠는지 추측하려 하고, 뭐 때문에 뿌듯함을 느꼈을런지 되짚어보려 한다.

그리고 성취를 이룬 이가 내 주변의 지인이라면, 결과에 대한 축하와 함께 그 과정에 대한 내 감상을 같이 전달하려 노력한다. 다만 노력한다,고 서술한 이유는 나도 여유가 없을 땐 그저 축하한단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어서다. 어쨌든 그게 내가 생각하는 '칭찬의 정석'이다. 그냥 축하해, 멋있다, 라는 말만 하는 것보다 시간이 배로 걸리는 건 사실이다. 누군가는 뭘 이렇게까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아마도 이건 내가 주변인들에 애정을 쏟는 방식인가 보다. 평소에 쉽게 연락해서 만나자!라고 하는 성격도 아니고, 이런저런 소식을 먼저 묻는 성격도 아니고 해서.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정은 혼자서라도 잘 간직하고 있어서. 가끔씩 그런 기회가 찾아올 때 그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거다. 내 정성을 다해. 무언가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만든 이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게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며 '열정'을 건물을 통해 감각하게 해 준 가우디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내 스스로의 성취에는 그만큼의 노력을 들여 아껴 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거리를 걷고, 사진을 남기고, 색감과 채도를 조정하며 '나의 바르셀로나'를 기억하려 애썼다. 가우디의 성취만을 감각하지 않고, 나의 성취에도 무언가를 스스로 느끼는 여행을 만들고 싶었다.



언덕 위에 올라 야경을 보며 생각했다. 무언가를 보고 빛난다고 생각했던 적이 언제 있지, 하고 생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건물들을 볼 때마다 '열정'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렸던 게 생각났다. 누군가의 열정 어린 모습을 보면 마치 빛나는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반짝인다. 야경을 구성하는 저 불빛 하나하나도 누군가의 쉼 속 조명이거나, 일 속 조명이거나, 이동 중의 차 불빛이거나 할 테다. 살아가는 모습들. 불빛이 더 반짝이는 듯했다.

나는 남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타인이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다. 취미 생활을 즐기는 친구의 모습이 반짝였고,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하는 친구의 모습이 반짝였다. 나는 언제 반짝였던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바르셀로나에서 세비야로 넘어갔다.



세비야는 바르셀로나보다 더 덥고, 화창한 날씨였다. 야자수과 노란빛 건물들은 날 좋은 '여름'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에서 언덕을 올라 야경을 바라봤듯, 세비야에서도 높은 건물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기회가 있었다. 밤보다 낮에 있는 특징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조명이라는 인위적 매개체 없이도 사람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밝은 햇빛 아래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림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우디의 건축물 곳곳을 바라보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인지, 그 자체가 반짝이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살아감'을 느낄 때 내 우울은 옅어진다. 타인의 '살아감'이든 나의 '살아감'이든 상관 없다. 힘겹게 살아내거나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을 느낄 때 나는 내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동력이 건드려지는 것이다. 



스페인의 사진들을 보며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던 순간의 나도 어찌 보면 조금은 빛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에 담기는 장면들을 관찰하는 과정이 좋았고,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의 감각이 좋았고, 그 후에 채도와 이런저런 것들을 조정해 가며 나만의 분위기를 살려보는 재미가 좋았다.

불타오르지는 않지만 작은 촛불 정도는 되는 열정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본 종류의 단어였다.



이밖에도,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엽서, 더운 한낮 오렌지나무 그늘 아래에서 먹은 젤라또, 아기 새들의 수영을 바라보며 미소짓던 시간들.


반짝이는 여행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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