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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봄-4.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헤이그


원래 다 그러고 사는 거야. 내가 너보다 더 힘들었는데 그래도 살았잖니. 다들 그렇게 살아.


이 말들에는 무기력이 깔려 있다. 변하지 않을 거라는 슬픈 믿음. 어차피 현실은 바뀌지 않을 테니, 지금의 고통에 그저 순응하라는 지시. 나는 그런 태도에 치를 떨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에게는 그런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뱉었던 것 같다.


나는 남을 대하는 것과 나를 대하는 것이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남에게는 친절하려고 애썼고, 부당한 것에 동조하지 않고 맞서는 것을 도우려고 했다. 아픔을 마주하면 공감하고 연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힘들다고 느낄 때 스스로에게 상냥하게 왜 그런지를 물어볼 줄 몰랐고, 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는 화도 나지 않았으며, 어린 날의 상처가 떠오르면 많이 아팠겠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를 가지고 뭘, 하고 무시했다.


내가 내게 가장 큰 적인 것 같았다. 그걸 고치려고 하노버의 병원을 찾았고 브레멘의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 독일 병원과 심리상담센터는 각각 주별로 한 군데서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있었다. 나는 독일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영어도 매우 유창한 편은 아니었기에 한국어로 진료와 상담을 받길 희망했는데, 내가 사는 괴팅겐에는 한국어가 가능한 곳이 없었다. 괴팅겐 대학교 학생증으로 니더작센 주 지역 내를 다니는 느린 기차는 무료로 탈 수 있었기에, 니더작센 주 전체로 찾는 범위를 넓혔다. 하노버와 브레멘에서 한국계 의사 선생님과 심리상담사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고, 두 달이 좀 넘는 대기를 거쳐 약을 먹고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여행은 약이 적응될 만한 무렵이자 첫 심리상담을 며칠 앞둔 시기였다. (우울증 약은 사람마다 다른 부작용을 동반하는데, 나같은 경우 3주 가량을 심각한 졸음에 시달렸다)


원래 다 그러고 사는 거야. 내가 너보다 더 힘들었는데 그래도 살았잖니. 다들 그렇게 살아.


네덜란드에서 나는 이 말들을 반박하는 무언가들을 많이 만났다. 심리상담이 시작하기 전의 여행으로서 아주 적절히 찾아온 행운이었다.



노을이 비칠 때의 운하가 아름다웠다. 네덜란드 하면 기억나는 풍경이 이 장면이라면, 네덜란드 하면 기억나는 이야기들은 모두 '당연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것들이었다.



반 고흐 박물관에 갔다. 귀족의 초상화가 아닌 하인의 초상화, 화려한 일상이 아니라 감자를 나누어 먹는 이들의 굳은살 박힌 손을 담아낸 그림. 회한을 담아낸 듯한 담배 피는 해골, 고된 인생이 느껴지는 낡아 빠진 신발. 고흐는 그런 것들을 그렸다. 예술이란 '당연히' 부유한 자들의 것인가? 고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을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의 추위와 고됨을 느끼는 이들에 주목하는 시선을 사랑한다. 중심이라 여겨지는 것들보다 곁가지를 살피는 시선을 사랑한다. 오디오 가이드 겸 보조 자료가 화면에 송출되는 기기에는 고흐의 스케치 과정이 담겨 있었는데, 굳은살 박힌 손을 그려내는 데 아주 집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낡은 신발을 그리기 위해서는 진흙을 묻히고 털어내기를 반복해 '낡음'을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시린 곳을 바라보려면 따뜻한 눈길이 필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며 맞이하는 고통 중에 당연한 것이라 치부될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차가운 무시가 아니라 따스한 포옹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흐의 작품들에서 온기를 느꼈고 위로를 받았다.



네덜란드의 아픈 역사를 주제로 한 박물관에도 다녀왔다. 그저 묻어두지 않고 기억하려는 공간이 내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망각의 과정에 맞서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방인인 나에게도 그것은 참 숭고한 느낌을 주었다.



안 쓰는 항구와 폐쇄된 기차역을 재생시켜 지역 예술가들의 터전으로 자리잡은 곳들도 다녀왔다. 자연스레 사라져갔을지 모를 곳들을 또다른 목적을 지닌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공간을 좋아하는 나 스스로를 보며, 나는 이렇게 살아나고 이어지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이준열사기념관을 다녀왔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이 먼 곳까지 오며 품었을 그 분의 마음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 할 것이라고 여겼다. 공동체를 위해 떠난 여정에서 느꼈을 수많은 좌절과 그것보다 더 컸을 간절함이 느껴졌다. 현실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에 대한 존경심으로 헤이그 여행을 마쳤다.



암스테르담과 헤이그를 다니며 느낀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함에 맞서는 단어들은 기억, 재생, 저항이 있겠다는 것이다.

하나는, 나는 그 단어들을 생각보다 더욱 좋아했다는 것이다.


원래 다 그러고 사는 거야. 내가 너보다 더 힘들었는데 그래도 살았잖니. 다들 그렇게 살아.


아니, 나는 그렇게 '당연히' 살아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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