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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13. 2023

겨울-1. [한국] 서울



19년간의 기억을 더듬으며 20살부터 서울의 밤을 보냈다. 


대학을 이유로 상경한 서울은 너무 넓었는데, 내 마음의 여유 공간은 참 좁았다. 학교 수업 외에도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으로 스케줄을 최대한 채워 지내며 마음 속 공허함을 잊으려 노력하던 나에게, 하루를 마치고 들어간 깜깜한 자취방은 ‘혼자’라는 생각에 잠기게 했다. 서울에서의 나는 외로웠으나, 외로움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그리 하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그것을 잡아줄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내 초라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기에 바빴던 것 같다. 


매듭은 지어질 때 견고할수록 풀어낼 때 잘라내는 수밖에 없어서, 원래 각자이던 두 줄에 회복할 수 없는 절단의 흔적을 남긴다. 상실이 무서워서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다들 그렇게 ‘잘린 매듭’의 형상이 있을 테다. 아직 묶여본 적 없는 끈을 조심스레 들고서는 잘리기를 두려워하는 표정과 함께.


나는 헤어짐을 그토록 무서워했다. 아주 어릴 때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떤 마음을 숨겨야 어른들이 귀찮아하지 않는지 잘 알고, 어떤 감정을 눌러야 어른들이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는지 잘 안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그때의 마음과 그때의 감정을 여전히 품속 어느 곳에 돌돌 말아두고 있다. 자신조차 펼쳐보지 않은 그 생채기는 풀지 않은 선물상자로 남아, 그 가치와 역할이 끝내 발견되지 못한 채 먼지 쌓인 빈 박스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모든 마음에, 모든 감정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당하는 것이다. 유년기에 형성된 습관은 청소년기에 확고해졌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를 옭아맸다. 제때 분출되고 위로받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은 채 곪았고, 그렇게 썩을 대로 썩은 내 마음은 우울증이라는 병에 잡아먹혔다.


모든 사랑은 깨어지고, 모든 인연은 떠나간다는 생각은 ‘혼자서도 살아남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되었다. ‘열심히’ 살다 보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학창시절의 나는 눈물을 달고 살았다. 강한 사람을 열망할수록 한없이 취약해졌다. 내신시험이든 모의고사든 잘 쳤을 때는 다음에 성적이 떨어질까 불안해서 울었고, 못 쳤을 때는 당장의 결과에 속상해서 울었다. 고3 때는 사설 모의고사와 전국 모의고사를 합쳐 수능 전까지 거의 매달 시험을 봤으니, 달마다 한 번씩은 기숙사 콜렉트콜을 붙잡고 집에 전화를 걸어 오열했다. 불면증은 달고 살았고, 조용한 아침 자습 시간에도 압박감이 심해지고 눈물이 차오르면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자주 감정적으로 무너지면 언젠가 무뎌질 법도 한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한국에는 모성애를 다룬 매체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항상 그랬다. 엄마한테 사인 받아와, 엄마한테 말씀드려, 엄마한테 준비물 꼭 사달라고 하렴, 이번 주에 어머니회 모임 있으니 말씀드리렴. 그런 선생님들처럼 애들도 항상 그랬다. 너네 엄마 운동회에 와? 너네 엄마는 김밥에 뭐 넣어? 너네 엄마는 왜 오늘 안 왔어? 사회적 편견이 상처가 되는 수단 중 하나는 개인적 발화다. 어린 시절에 그것은 강렬한 기억으로 작용한다. 나만 이상한 기분, 나만 잘못된 기분. 이상하거나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알더라도 그 ‘감정’만큼은 오랜 시간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한부모가정이고 어린 시절부터 아빠랑 자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의 양육자에 대해 그렇게 느끼겠지만, 나도 자라면서 섭섭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엄마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게 하지 않으려고 자식을 ‘더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자 했던 아빠의 방식들은 내게, 아빠가 내게 주는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닌 ‘조건부 사랑’ 같다는 의심을 들게 했다. 상을 받아 와도 축하보다는 아쉬운 점에 대한 지적이 앞섰고, 성적이 좋아도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더 잘했을 텐데, 하는 대답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매체들에서 이따금 그려지는 그 비현실적 모성애, 그것보다 어쩌면 더욱 커다랗고 소중하고 힘겹게. 지긋지긋한 이혼 과정 내내 나를 지키려 노력했던 장면들이 그 증거다. 이따금씩 말하시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싸우더라도 나는 네 편이다”라는 말도.


내게 사랑의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주 어릴 때의 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주변에 의해 사랑의 부재를 느꼈나 보다. 그 자리를 아빠가 채워주고 있었는데도 난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인 것 같았다. 나는 왜 엄마가 이것저것 해주지 않지? 엄마라는 건 자식을 저렇게 사랑하는 존재라던데 말이야. 그게 당연한 건데 나는 엄마의 사랑을 못 받는 걸 보면 내가 사랑스럽지 않은가 봐. 그래서 우리 엄마가 내 곁에 없나 봐.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아빠의 사랑이 날 챙겨주고 있었음에도, 엄마와 아빠의 이혼 사유는 내 탓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했던 비합리적 사고 자체는 성장하면서 고쳐지더라도, 그 어린 시절의 비합리성이 남긴 짙은 감정과 느낌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 속 어딘가를 지속적으로 건드리곤 한다.


엄마라는 존재가 내 곁을 떠난 지 거의 15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에 모자란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나의 엄마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아이는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양육자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며, 그 양육자는 누구든 될 수 있다고. (첨언하면, 부모가 아니라 양육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받았던 것과 똑같은 상처를 누군가에게 주기 싫어서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에게, 친척에게, 시설 선생님에게, 또는 형제자매나 다른 누군가에게 양육된 모든 이들과 그들을 키운 사람들의 사랑을 다 포괄하고 싶어서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시기가 대학 입학 이후부터 교환학생을 떠나기 직전까지였다. 서울 자취방에서 혼자 있을 때면 예전에 부모님이 싸우던 기억들이 생각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택한 방법은 그것을 오롯이 감내하며 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재정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아진 기억의 조각들은, 독일에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하며 봉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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