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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가을-2. [덴마크] 코펜하겐


노을빛 바다와 무지갯빛 하늘, 코펜하겐의 장면들이었다.

여기서의 탐구 주제는 '행복'이었다.



덴마크가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는 걸 들어보곤 했다. 행복에 관한 무언가가 있을까 해서 구글맵을 뒤적이던 중 '행복 박물관'이 있는 걸 알게 되었는데, 내가 그 박물관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관람객들 각자가 각자의 행복을 말해주는 단어들을 포스트잇에 적고 그것들이 작은 방을 가득 메운 공간이었다.


나는 단어의 미묘함에 관하여 생각했다.

관하여와 대하여, 정렬과 배열, 웃음과 미소, 자국과 흔적, 애상과 애수.


단어들을 고민하는 순간들이 좋다. 누군가 내게 그런 정성을 보여주는 듯한 손편지도. 미묘한 단어들 간에 큰 차이가 있다고 느껴서가 아니다. 그 차이조차 시간을 들여 고민할 정도로 마음의 전달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다.


그러나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멀리했다. 내게는 묻으면 안 될 단어인 것 같았다. 무채색의 삶을 살던 이에게 염료를 선물한다면 그는 분명 화들짝 놀랄 것이다. 색감을 내는 것 외에 무해함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귀를 막고 팔을 휘저으며 본인의 삶을 '그대로 두라'고 했을 것이다. 평생 감각해본 적 없던 채도를 낯설어하며. 그저 채도일 뿐인데.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인데. 사랑이, 정이, 인연이, 추억이, 뭐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무채색이 두려워하는 무언가일 게다.     

'사랑'을 나는 바라면서도, 증오했고, 갈구했다.

고질병이 내 발목을 잡을 때마다 스스로를 증오하고 애정하면서 말이다.


그런 내게 행복에 관한 단어들이 가득 적힌 그 방은 낯설면서도 두근거렸다. 나도 언젠가 이것들을 가까이할 용기가 날까, 하면서. 



또 하나 인상깊었던 것은, 박물관 안 화장실을 들렀다 나오는데 거울 대신 저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거울이 필요한 사람에게 "You look great"라고 말해주는 쪽지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포스트잇으로 가득하던 방에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적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지만, 사랑받고 싶은 대상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나도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생각했다, 세상에 정 둘 곳 아무리 없더라도 본인은 본인의 가족이라고.

어찌되었건, 친구든 연인이든 본인이든 가족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는 많다.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가족인 거지, 가족이어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 날도 아닌데 햇살을 즐기고 음악을 들었다. 우연히 마주한 한국인 가게 주인 아주머니와 웃고 떠들었다. 삶을 살았고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 날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생일도 무엇도 아니었다. 아무 날도 아님에도 코펜하겐에서의 날들이 꽤 괜찮았다.

무엇이 아니라면 뭐 어때. 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떤 날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위적으로 나눈 어느 시기의 어느 순간이어서가 아니다. 오늘 무슨 날이냐는 물음의 이유는 기회들의 24시간짜리 집합인 오늘이 과연 '무엇'으로 채워졌냐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니까. 텅 빈 껍데기 말고.

아무 날도 아닌데 별 것 없이 행복했던 날이라는 게 반가워서, 그런 날이 자주 '있음에도' 자주 '느끼지는' 못 하던 것 같다는 게 서러워서 거리를 걷다가 울 뻔했다.

그럼에도 완전히 잊고 있던 어떠한 에너지가 다시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나 좀 괜찮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다. 90도 기울어진 신호등을 보며, 저 친구 참 특색 있네, 라는 생각과 함께 오, 나 관찰력이 좀 좋은데, 라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걸 보며 말이다. '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동안의 여행에서 도시재생 사례나 환경보호에 관한 사례들을 찾아다닌 기억이 좋아서 여기서도 그러기로 마음먹고 그 쪽으로 가고 있던 중에, 지역 벼룩시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지역 농가의 발전 방향에 대한 토론회가 있었고, 작은 판매 부스들이 있었다. 꿀, 잼, 빵, 꽃. 여러 종류의 물건들에 깊은 노력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라고 다시금 느꼈다.



카약을 무료로 타면서 물 위에 떠다니는 쓰레기를 줍는 프로젝트, 그린카약이 있는 장소를 가 보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 체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항구 옆에 수상 컨테이너로 지은 학생 기숙사를 보았다. 찾아보니 물 위라는 공간을 활용해 가격을 상당히 저렴하게 낮추었다고 했다.

무언가의 개선 방향을 고민하는 일에는 애정 어린 시선과 행복에 대한 희망이 내재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게 좋아 유럽 여행에서 관광지보다 이런 곳들을 다녔던 듯하다.



행복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Human Library를 보며 그런 생각을 다시금 했다, 행복의 종류는 삶의 수만큼일 것이라고.

휴관일이어서 외관만 구경할 수 있었지만,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이 곳은 난민, 소수민족, 장애인, 홈리스,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었다. 사람이 한 권의 책이 된다는 의미로 Human Library인 것이었다.

나의 행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쉽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 곳곳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낀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뉘하운 운하를 구경하다 쏟아지는 폭우에 옷이 다 젖었다. 어쩌지, 하고 생각하던 중에 거짓말처럼 비가 갑자기 뚝 그쳤다. 쫄딱 젖은 내 모습이 조금 웃겼다.

볕들 날이 있겠지, 하는 말이 생각났다. 먹구름과 천둥과 번개와 비에 대한 부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회색빛에 대한 반감. 그럼에도 나는 그 찡그림을 집어 품 속에 곱게 담고 온기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계절 봉합수술>은 살아가는 느낌이 아니라 버텨내는 느낌을 가득 머금은 잿빛 단어들에 쓰는 편지다. 나는 당신이 온갖 것들을 끌어안고도 유유히 바람을 따라 걸음을 옮겨내고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볕이 들든 들지 않든 당신의 날씨를 응원한다.          


내 마지막 유럽 '여행'이 끝났다. 이제 귀국행 비행기를 타는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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