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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가을-3. [독일] 프랑크푸르트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유럽 생활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끝났다. 뮌헨에서의 한 달 살이를 정리하고, 괴팅겐의 호텔에서 일주일 남짓 지내며 학교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처음 오던 날처럼 커다란 캐리어에 무거운 백팩을 메고 기차를 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괴팅겐으로 처음 향하던 기차 안에서는 설렘이 컸는데, 거꾸로 괴팅겐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 안에서는 내 감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나는 들뜨지도, 서운하지도, 즐겁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그저 독일 빵을 마지막으로 맛보고 싶다는 생각에 비행기를 기다리며 크로와상 하나를 먹었다.

나는 비행기에 올라서야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스스로에 대한 애틋함이었다.

잘 견뎠구나, 하는 애정 어린 시선. 나는 그 시선을 받기를 바래왔음에도 스스로에게 그것을 던져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지난 날들을 다시 쥐어보는 데 시공간적으로 좋은 조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햇살이 동공에 내리꽂힌 화살마냥 강렬한 시간대는 좋지 않다. 흑암이 뒤꿈치를 즈려밟을 듯해 불안한 시간대도 좋지 않다. 탁 트여 타인의 눈초리에 얻어맞기 좋은 공간은 좋지 않고, 그렇다고 꽉 막혀 우울의 심연 속으로 내려앉는 공간도 좋지 않다. 나쁘다는 서술어를 붙이지 않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일 뿐이다. 좋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어떤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그 좋은 조건들을 모조리 충족한 공간 같았다. 나는 비행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을 먹으면서,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에 인종차별을 당하고 분노에 차서는 원래 먹으려던 소세지와 맥주를 뒤로 한 채 비빔밥을 시키던 내가 떠올랐다. 불빛으로 빛나는 밤의 프랑크푸르트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하늘 위에서 인천을 바라보던 날이 떠올랐다. 모든 행동과 시선이 현재에 그치지 않고 과거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한때 나는 간결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했다. 찬성 아니면 반대, 모 아니면 도. 잘하지 못할 것 같으면 시작조차 안 했고, 공백 없는 계획을 지키지 못하면 플래너와 건강 중 하나를 버렸다. 두루뭉술한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 좋던 성향과 경쟁에 느긋하던 천성에 균열이 생겼다. 한국 대학 입시에 적응하기 위한 한 학생의 비자발적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타인은 내 원동력이 되지 않았다. 누가 나보다 더 잘 해도, 누가 나를 평가절하해도, 질투도 오기도 안 들었다. 거의 유일하게 바랐던 것은 가족의 칭찬 정도가 있겠다. 균열의 원인은 자신이었다. 고등학교 기숙사 열람실의 전등을 가장 일찍 켜고 가장 늦게 끄던 날들을 반복하던 때, 원동력의 중심은 나보다 잘 하던 친구들이 아니라 '쉬어도 될 만큼 최선으로 살았는지'였다. 즉, 내 휴식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하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다만 누군가에 대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에 감사할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도덕적 문제를 떠나서 '원동력으로서의 효과성과 지속성'의 관점에서도 동경과 애정이 질투와 시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균열의 흔적은 새로운 균열로 망가진다. 독일에서의 나는 잠이 오면 잠을 잤고, 날이 좋으면 날을 즐겼고, 아침 식사로 택한 빵의 맛에만 집중하려 '다음 할 일'을 잊은 채 갓 구운 브레첼에 페퍼로니맛 크림치즈를 발랐다. 갑작스레 등록한 댄스 강좌를 수강하고 난 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는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생각하기도 했다. "아, 사람들 재밌게도 사네. 그동안 나는 ‘살 맛 난다’는 느낌이 뭔지도 몰랐는데!" 강좌가 열리는 곳은 학교 체육시설들과 넓은 공원이 함께 있었기에 각종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사람들이 각자의 여유를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모습이 내게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균열이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한 번, 독일의 작은 대학도시에서 한 번. 그렇게 균열을 맞이한 삶은 변화의 흔적이 남아있을지언정 파괴되거나 부스러지지 않았다. 아직도 명료한 것을 좋아하지만 희끄무레한 것도 아낀다. 지금까지도 동요 없이 냉정을 유지한 채 깔끔하고 빠르게 일을 완수하는 방식을 동경하지만, 예민하고 주저하며 자그마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고민과 미련의 시간을 사랑한다. 어떤 방향이든 나름의 장점은 있기 마련이니까.

따라서 균열도 이로울 수 있다는 것이 귀국길 비행기에서의 내 결론이었다. 글이 마무리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당신의 균열은 무엇이었나?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나왔고,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에 인종차별을 당하고 분노의 비빔밥을 먹었던 것과 괴팅겐에서 샐러드용 야채믹스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던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먹으며 한국에 돌아간다는 걸 실감했다.

나는 두려웠던 듯하다. 아팠던 장소로 다시 돌아가면, 그 아픔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겨내 왔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심리상담을 받고, 여행을 다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고, 약을 먹고, 그렇게 무너진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노력했던 날들이 기억났다. 다시 돌아가서도 내 치유는 계속 이어질 수 있어, 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나의 유럽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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