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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에필로그. 다시 서울에서


다시 돌아온 한국은 가을이었다. 유럽에서 사진 찍는 게 새로운 취미가 된 나는 단풍을 렌즈에 담아내는 데 재미를 붙였다.



풍경을 포착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는 것은, 세상을 무채색의 마음으로 대하던 예전의 나와 참 달라진 부분이었다. 주변에 관심도, 호기심도 없던 내가 외부 세계의 빛깔과 내음에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울증은 슬픈 병이라기보다 무기력한 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무력한 고립 상태'를 깰 수 있는 방법은 '충격 아닌 자극'을 주는 것이다. 예전의 나처럼 스스로를 일에 치여 살도록 만든다거나 배가 아플 정도로 허기를 채우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공허함과 뱃속의 허기짐을 착각하는 짓은 '충격'에 불과하다. 건강하지 않은 충격은 오히려 본체의 무기력과 고립을 한층 더 강화한다. 그러나 나와 세상의 연결고리를 느끼고, 세상의 사소한 부분들을 관찰하다 보면 건강한 자극이 온다고 느꼈다. 서울에 다시 돌아온 나는, 그런 건강한 자극을 여럿 찾아보려 노력했다.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정 붙일 곳을 찾아다녔다. 독일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고민했던 것처럼, 서울에서도 좋아하는 풍경과 장소를 찾아내고자 했다. 다시 아플 때 휴식처가 되는, 다시 힘들 때 안식처가 되는 곳을 미리 마련해두고 싶었다. 그 중 하나는 서울숲이었다. 푸릇한 잎들과 까르르 웃는 아기들이 많았다. 헤드셋을 끼고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평온을 주었다.




한강을 지날 때마다, 지하철 속 주변 사람들의 눈길은 핸드폰 안에만 있는데 내 눈길은 강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을 자각하곤 했다. 4년 남짓 서울에서 살아가며 한강을 꽤 많이 봤는데도, 볼 때마다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간 서울을 익숙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듯했다.



그럼에도 한강의 풍경이 그리울 때가 있다. 뚝섬한강공원의 '자벌레'라는 곳을 찾았다. 자벌레 모양으로 생긴 시민 휴게공간인데,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면 한강 수면 위에 비치는 빛이 햇빛으로부터 건물 조명으로 바뀌는 것을 감상할 수 있다. 자연적 빛에서 인위적 빛으로 넘어가는 오묘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도서전 소식을 찾아다니거나 새로 생긴 독립서점을 알아보곤 했다. 말과 글은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주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서점을 찾아다닌 기억과 현재가 겹쳐 보일 때마다 뭔가 모를 즐거움도 들었다.



LP를 들으러 바이닐앤플라스틱에 가끔 가곤 했다. 예전 음악을 들으며 오래된 가사를 곱씹는 것도 새로 들인 취미 중 하나다. 할 일에 치여 '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는데, 방법을 하나 찾은 것 같다.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예전보다 조금은 더 즐기고 나눌 줄 알게 되었다. 감정도, 경험도, 일상도, 특별한 것도 혼자만 간직하지 않는 것을 연습하는 중이다.



단 것을 적당히 즐기는 연습을 하려고 했...지만 '적당히'는 참 어렵다. 서울에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주기적으로 우울이 찾아왔으나, 위에 나열한 것들을 하며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예전에는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 그저 가만히 혼자 고립된 채로 지냈는데, 우울이 영영 오진 않더라도 우울과 '그럭저럭 괜찮은 동행'을 하는 정도로 변했다.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바닥을 치지 않는 것만 해도 많이 변했다고 느낀다. '깨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둔 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단 것을 찾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다만 가끔은 탐닉하는 수준으로 단 것이 당긴 적이 있어서, 다른 방법과는 달리 조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었다.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원데이 클래스를 '호기심'으로 신청했다. 호기심이란 내게 정말 없는 성향 중 하나였고, 이 이야기를 한 주변 친구들은 다들 '니가 그런 델 갔다고?' 하며 놀라곤 했다. 굳이 안 하려던 짓을 해보는 건 꽤 재밌었다. 음식의 맛도 좋았지만, 인생의 맛이 있다면 그 수만 가지의 맛 중에 하나를 새로이 느껴본 것 같아 좋았다. 재미를 추구하자.



마지막 취미로는, 독립영화관에 가서 혼자 영화를 관람하곤 했다. 블로그에 짧은 감상문을 남기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자취방에서 나 스스로의 과거에 얽매여 옛 기억을 헤메던 예전의 어느 나와,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공감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는 지금의 나를 비교하자면 나는 현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영화를 봤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울이 찾아올 때 가장 어려운 일은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일인데, 그 경험이 몇 번 쌓이다 보니 현관문을 넘어 영화관 문까지 오는 동안의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이 지지부진하고 힘겨웠음에도 어쨌거나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서울에 정을 붙이는 여정을 몇 달 정도 하고 나서야 유럽에서 모아 온 여러 엽서들을 어딘가에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간 유럽에서 찍은 사진을 활용해 콜라주를 만들고 작은 전시회에 내걸었는데, 그 일이 끝나고서야 든 생각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두 계절, 가을과 겨울을 거의 다 보낸 시점이었다. 서울에도 '정을 붙였다'고 느껴진 즈음이었다.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을 인화하고 사 모은 것들을 한데 모아 옷장 벽이나 냉장고 벽에 하나 둘 붙이기 시작했다. 흰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가득 채운 뒤에야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의 유럽여행은 오늘에서야 끝이 났다고.


여행은 돌아오는 날에 끝나지 않는다. 내가 그 기간을 통해 얻은 것을 온전히 소화시킨 다음에야 그 여행이 끝난다. 10월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내가 나의 유럽여행을 끝내 소화시킨 시점은 다음 해 2월의 끝자락이었다. 낯선 이로서 낯선 곳들을 다니며, 익숙하지만 친하지 않았던 스스로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이 어떤 것에 집중하고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외부의 '할 일'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무엇에 마음이 편해지는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 어느 것이 내게 휴식을 주며, 하루의 시간 중 언제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지금 터잡은 도시에서 나의 안식처를 찾아냈는지.


여러분은 타인의 여행기를 읽으며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셨는지 궁금하다. 나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며 간접적으로나마 내가 찾은 세상 곳곳의 따스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명 관광지를 잘 소개해주는 글도 아니고, 새로운 여행지를 개척한 글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여행기를 쓰고 싶었다.


정말 솔직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브런치북 공모전 소식을 늦게 접하고 급하게 연재를 시작한데다, 개인적으로 바쁜 시기가 겹쳐 여유를 두고 탈고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크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서툴게 담겨 있고, 표현도 잘 다듬어지지 않아 어디 내놓기 조금 부끄러운 글들이다. 그럼에도 이 글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이유는 하나다.


당신에게 이 글이, 당신 스스로에게 닿는 여정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을 권합니다. '집 앞 10m 여행'도 당연히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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