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대전

할매VS 손녀

by 김여은

몇 달 전부터 할매와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남들이 들으면 다 웃을,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주 진지한 그 싸움의 현장은 다름 아닌 화장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아마도 여름쯤이었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던 할매가 나를 불렀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고, 가져다 달라고. 내가 건네주는 휴지를 받으며 한껏 구시렁대는 할매. "휴지를 다 썼으면 가져다 놔야지. 오줌 누고도 안 닦으면 얼마나 찝찝한데. 얼마나 깔끔한 사람인데 내가."


마치 나를 마지막 휴지 한 칸을 쓴 범인이라 확신하는 듯한 뉘앙스다. 엄마아빠는 대부분 안방 화장실을 사용하니 사실상 우리 집 거실 화장실을 쓰는 건 할매와 나, 그리고 오빠 셋 뿐이다. 그러니 축복받은 신체 구조상, 작은 일엔 휴지가 필요 없는 오빠는 자연스레 용의 선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조금 짜증은 났지만, 볼 일 보고 휴지가 없음 짜증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열심히, 정말 성실하게 휴지를 채워놓곤 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꼴랑 한 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휴지가 걸려있는 날이 잦아진 거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예 속살을 드러낸 휴지심이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그런 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 어정쩡한 휴지는 아주 귀찮고도 애매한 존재였으니- 당장 쌀 것 같은 순간에도 새 휴지를 가지러 가야 했고, 그러면서도 왜 휴지를 다 쓰고 가져다 놓지 않았냐고 누군가를 타박할 수도 없었다.

범인을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할매가 개발한 고도의 전략임이 분명했다. 휴지를 다 쓰자니 새 걸 가져다 놓기가 귀찮고,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자니 큰소리쳐둔 게 있고. 아마도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처음 몇 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뭐, 울 할매는 절약정신이 투철하니 한 장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겠지, 어쩌다 보니 공교롭게도 한 장이 남은 거겠지.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모든 의혹이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모임에 늦게 돼 '내 것 좀 남겨놔!' 했는데 달랑 고기 한 점 남겨놓고는 '여기, 당신 거 남겼어. 마지막으로 먹었으니 계산은 그대가!' 하는 꼴이 아닌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의 유치뽕짝 기싸움.


이른 아침. 눈을 비벼가며 비몽사몽 간에 변기에 앉는다. 청명한 쉬야 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아침을 시작하려는 찰나, 한 칸이 남은 휴지가 눈에 띈다. 에라이, 젠장. 예정에 없던 아침 샤워를 한다. 휴지 한 칸은 그대로다. 늦은 오후. 묵직한 배를 붙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여전히 걸려 있는 휴지 한 칸이 눈에 띈다. 안방 화장실로 방향을 튼다. 저녁 식사 후, 방에 있는데 할매 목소리가 들려온다. "애미야. 휴지 좀 다오. 휴지가 없다." 제 아무리 우리 할매래도 휴지 한 칸으로는 뒤처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일이 수 차례 반복되고 있는데도 할매는 계속해서 휴지 한 칸(가끔은 두 칸)을 남기고 있다. 장기전이 되다 보니 이제는 이 싸움이 좀 지겹다. 전투력이 떨어져서인지 짜증보다는 어이없는 웃음이 앞선다. 휴지 가지러 가기가 오죽 귀찮으면 그럴까. 허리가, 다리가 오죽 아프면 그게 귀찮을까. 뭐 그런 생각도 가끔 해본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엔가는 '아 이 할매 진짜!!!!!!!!!!!!!!!!!!!!' 하지만.



효녀 마인드로 이만 끝낼 수도 있는 싸움이지만 아무래도 그리 쉽게 끝나진 않을 것 같다. 전처럼 치열하진 않더라도 얇고 길게, 아마도 이 싸움을 계속 이어갈 테다. 이렇게 사소한 싸움을 끊이지 않고 살아온 게 할매랑 나니까,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이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많이 슬프다.

내게 애증이 뭔지 가르쳐 준 할매. 할매요, 우리 앞으로도 한 20년 더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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