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대전

할매 VS 손자

by 김여은


할매가 오빠랑 냉전 중이다.

울할매로 말할 것 같으면 인생의 모든 기준이 오빠에게 맞춰져 있는, 그야말로 손자의, 손자에 의한, 손자를 위한 인생을 추구하는 열혈 할머니다.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들보다도 아들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는, 손자 바라기 되시겠다. 그 덕에 나랑은 30년째 지겹게 싸우고 있지만 오빠랑은 대체로 늘 사이가 좋다.

물론 가끔 오빠마저 할매한테 짜증을 낼 때도 있지만, 할매는 다 이해한다. 당신의 손자는 너무 잘 나서 늘 바쁘고, 그러니 피곤하여 신경이 예민한 거라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데이트만 하는 줄도 모르고. 오빠는 밖에서 더 맛있고 더 좋은 것만 먹고 다니는데, 당신의 손자가 밥을 안 먹고 다녀 큰일이라고 걱정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아무튼, 그런 할머니가 오빠에게 삐쳤다.





시작은 운동화였다. 그제 아침 할매는 늘 그렇듯 현관에 나와 오빠의 출근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런데 깔끔 대마왕인 울할매의 눈에 오빠의 '하얗지 않은 하얀 운동화'가 거슬린 거다. "운동화 좀 빨아야겠다!" 할매는 한 마디 했고, 다정한 손자는 "안 그래도 조만간 요 앞 빨래방 맡길 거야. 몇 천 원이면 되니까 괜히 또 빨아놓고 그러지 마! 허리도 아픈데."라고 대답한 뒤 회사에 갔다.

그날 저녁 여느 때처럼 애인과 밖에서 저녁을 먹은 오빠가 돌아왔을 때, 할매는 보자마자 아주 으쓱한 태도로 "운동화 찾지 마. 내가 빨아주는 데다 맡겼어." 했다. 그 한마디 말에 '내가 요즘 이렇게나 허리가 아픈데도 사랑하는 우리 손자를 위해 희생했어.'라는 속뜻이 담겨 있다는 걸, 할매와 30년을 살아온 내가 모를 리 없다.

"아 할머니 왜 그랬어. 내가 맡기면 되는데. 몸도 안 좋으시면서! 에휴... 그래도 할머니밖에 없네!" 할매는 아마도 이런 대답을 기대했을 거다. 그러나 오빠의 반응은 할매의 기대를 처참히 부숴버렸다.

"아 그걸 왜 맡겨! 내일 신으려고 냅둔 건데!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해!!!!"

그랬다. 오빠는 애인과 만난 지 1년 되는 날을 앞두고 나름의 풀 코디를 준비해놨고, 하필 그 운동화가 그날의 코디에 화룡점정이 되는 아이템이었던 거다.

얼굴까지 벌게져서 마치 활화산마냥 화를 쏟아내는 오빠의 모습에 할매는 전쟁 중 폭격이라도 맞은 듯 얼이 빠져 버렸다. 그러더니 그 늦은 시각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할머니를 원망스럽게 보던 오빠는, 할머니에게 향하는 건지 자신에게 향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화를 참으며 숨을 고르다 그 뒤를 따라나섰다.

잠시 후 오빠가 먼저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들어와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갔고, 20초 정도가 지나 멋쩍은 표정의 할매가 조용히 들어왔다. 날 보고는 "내가 빨리 해달라고 해서 벌써 빠는 데로 가져갔다네." 하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더니 스러지듯 방으로 들어가는 나의 할머니. 불쌍한 늙은 여인.




지랄 맞은 나였다면 오빠보다 더했을 텐데도 오빠가 미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무 신발이나 신으면 되지 지가 무슨 패셔니스타라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한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할매가 고집하는 저런 식의 사랑법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랑을 전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저 사랑법. 나는 그게 지겹다. 그래 놓고는 자기 맘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마음 다치고, 내 희생을 니들이 아냐는 듯 야속해하는 할매의 태도가 지친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할매를 위로하지 않았다. 오빠 편에서 같이 쿠사리를 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할매의 역성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하여간 할매는 그게 문제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 셈이다. 나는 그런 손녀다. 차갑고 쌀쌀맞은, 정 없는 계집아이. 그러니 오빠에게 눈을 흘길 자격이 내겐 없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우리 모두에겐 자격이 없다.


자격 없는 자식과 손주들과 함께 사느라 할매는 슬프다. 오빠와의 한바탕 소동 이후 부쩍 기운이 없다. 어젯밤 할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온 오빠에게도 데면데면하다. 아마 곱씹을수록 서운한 맘이 드는가 보다.


중요한 기념일에 2프로 부족한 코디를 하고 간 오빠는 애인 덕에 200프로 충전을 하고 돌아왔을 텐데, 할매의 뻥 뚫린 가슴은 누구도 채워줄 길이 없다. 외로운 나의 할매. 가엾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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