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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래 Aug 17. 2020

작은 마을, 베초

[사카르트벨로] 열두 번째 이야기, 베초 Becho


여행의 진리는 설산 아니겠어


    아뿔싸, 쿠타이시에서 메스티아로, 오전 9시에 출발하는 마슈롯카는 만석이었다.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여행을 하다 보니 여유를 부리다 예매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터미널 직원들이 무려 트빌리시에서 출발하는 메스티아행 버스를 불러주었다. 모로 가도 메스티아로만 가면 되는 것이니, 그 날 안에 메스티아에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마슈롯카는 산길과 물길을 따라 굽이굽이 해발 1,500m에 있는 메스티아를 향해 갔다. 기사 아저씨의 난폭한 운전에 반쯤 정신을 잃고,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반쯤 정신을 놓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베초'라는 마을이었다. 마슈롯카에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했던 '루카'라는 아이와 그의 아버지도 베초에서 함께 내렸다. 마을 입구에 세워둔 루카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했다.


    베초라는 마을은 시그나기와 트빌리시를 함께 여행했던 S가 추천해준 곳이었다. 사전에 베초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었고 조사해서 나오는 관광지도 아니었지만, 그의 추천에 덜컥 그가 머물렀다는 싱글룸을 예약해버린 것이다. 소박하게 꾸며진 싱글룸에는 레이스 커튼이 달려있었고, 우쉬바 산이 보이는 마당에는 해먹이 걸려 있었다. 오로지 '쉼'을 위한 공간이었다. 




오른쪽 싱글룸 내 방 창문, 우쉬바 산을 보면 멍 때리던 내 소파 / 내 해먹 (전부 내 것이었던 것들 ㅠㅜ)



    베초에는 식당과 카페는 물론이고 구멍가게조차 없었다. 그런들 어떠하리, 이 집 가정식이 그렇게나 맛있다는데! 짐을 풀자마자 저녁을 주문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테이블에는 내 저녁밥이 차려지고 있었다. 빵 네 조각에 돼지와 감자를 볶은 요리, 비트 샐러드, 고기와 야채가 들어있는 수프가 한눈에 보기에도 참 정갈해 보였다.


베초에서의 첫 저녁 식사


    식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영국에서 온 메리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계셨다. 남편과 함께 막 트래킹을 하고 온 참이라고 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두 분이서 오붓하게 자유 여행을 하는 모습에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인 채로 수십 년을 함께하는 관계란 어떤 것일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앨런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국인이냐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가르쳤던 한국인 남자아이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하신다. 우리는 뜨끈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앨런의 영국식 발음과 고급 어휘에 내 머릿속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둘째날 아침 식사 / 둘째날 저녁 식사 / 셋째날 아침 식사


    둘째 날 아침 식사부터는 아침저녁으로 메리, 앨런 부부와 겸상을 했다. 존대 없이 대화를 나누니 내 마음가짐도 이분들을 나이 차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생각하지 않고, 어쩌면 친구로 여기게 되는 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국식 문화가 몸에 익어 있어 분주하게 그분들을 챙기기는 했지만, 어르신이 아니라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메리와 앨런은 부지런히 하이킹에 나섰고, 나는 한참 동안 소파와 해먹에서 뒹굴거렸다. 등짝이 뻐근할 즈음 지도상으로 보이는 윗마을 '마제리'로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북쪽으로 살랑살랑 걸어가는데 어쩐지 하늘이 점점 시커메진다. 저 멀리 다가오는 듯한 먹구름을 입김으로 불어도 보았지만, 구름이 사라지기는커녕 거침없이 몰려오기만 했다.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는 듯해서 급히 베초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베초 트럭 슈퍼를 만났다. 트럭 안에는 빵, 야채, 과일 등이 가득했다.




    내 방에 와서 다시 뜨끈한 차 한 잔. 몸을 녹이고 침대 안을 파고든다. 다음 날이면 벌써 6월인데도, 이 깊은 산속 마을의 밤은 아직도 차디 차다.





    하늘이 조금 맑아졌다. 오전 시간을 또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보냈다. 평소에는 조금도 성실한 타입이 못되는데 여행지에 와서는 자꾸만 분주해졌었다. 베초에서 보낸 시간들이 내게 강제 휴식이 되어주었다. 좀이 쑤시도록 소파와 해먹에서 뒹굴거리며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무한한 초록을 만끽하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휴식의 모양.




    그동안 외국인 치트키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가 꽤나 쉬운 편이었는데, 이 집 딸내미들은 어딘가 녹록지 않았다. 스티커와 머리핀을 선물했는데도 볼뽀뽀를 얻을 수 없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었다. 빨간 후드를 입은 옆집 소년은 하이파이브라도 해줬는데 말이야. 





    메리 앨런 부부가 하이킹을 마치고 돌아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는 동네 언덕에 올랐다. 내일이면 드디어 메스티아에 가는 날. 




    다음날 아침, 메리 앨런 부부와 함께 체크 아웃을 하고 메스티아로 향했다. 메스티아에서는 다른 숙소에 묵게 되어 아쉬워 속상해하는, 쿨하지 못한 나에게, 메리는 오며 가며 또 만날 것이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메리의 따스함을 품에 안고 메스티아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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