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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글쟁 Nov 28. 2020

기록(記錄)

흔적을 남긴다는 것

"얘들아, 우리 여기에도 갔었네?"

연말이 되면 나는 그동안 저장해둔 사진들을 추려 앨범을 만든다. 조금씩 정리했다면 좋았으련만 1월부터 지금까지의 사진을 정리하자니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힘은 좀 들지만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위안 삼을 수 있다. 이미 잊어버렸던 일이나 장소, 그 순간 아이들의 표정들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라 새삼 시간이 훌쩍 흘렀구나 생각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둬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메모광이셨다. 집안 곳곳에  남긴 메모며, 어떤 장면인지도 모를 흑백사진들이 가득한 앨범, 녹음테이프, 먼 곳에 사는 친척들이 오면 늘 같은 포인트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할아버지는 늘 순간을 기록하시려고 애쓰는 분 같았다. 그 기록들이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살아가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알았다.


대학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내가 보고 자라면서 익숙하게 느껴졌던 할아버지의 기록들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소한 기록들 켜켜이 쌓여 이어져 갈 때 비로소 역사가 된다. 기록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고 가다듬어 오늘을 살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셈이다. 사소한 기록이 역사가 된다니 좀 무엇인가 거창한 것 같다. 하지만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개인이 가정을 이루고 가정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결국 국가를 이룬다는 면을 생각한다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공부한 민속학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연구방법은 기록하는 것이다. 구비문학 전공자인 나는 필드에 나갈 때 세 가지를 준비했었다. 필기도구, 녹음기, 카메라. 나는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녹음해서 그 녹음파일을 들으며 문서화시키는 채록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논리와 구조를 찾기 위해 애썼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과정이 왜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입을 다물거나 세상을 떠나면 그대로 소멸된다.

그런 말이 있다. '노인 하나가 세상을 떠나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민족은 고령의 노인 옆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게 한다. 그 노인의 삶과 경험을 어린아이에게 전달해주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 전설, 민담 같은 옛날이야기들도 그런 특성을 띤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지금은 그 사이에서 기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지금은 이야기를 책과 그림, 영상, 음성 등의 다양한 콘텐츠로 접할 수 있다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라져 가는 박물관들이 수두룩한 현실이다.


할아버지의 습관 대물림, 그리고 민속학을 공부한 나는 아줌마가 된 지금도 여전히 기록한다. 매일 가족과 함께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매일 먹은 음식도 사진으로 남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찍고 써서 어딘가에 기록한다.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타이핑하기도 하고 사각거리는 만년필로 글씨를 쓰기도 한다. 파일 앞에는 년월일의 일련번호를 붙이고 내용을 간략하게 적는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쭉 이어져온 습관이다.

그렇게 나에게 기록은 일상이고 습관이다. 남들은 별나다 할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해온 일이기도 하고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기록들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글을 쓸 거리가 나온다.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를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나와 내 가족의 역사를 차곡차곡 정리한다는 만족감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기록의 욕구는 있다. 몰상식한 일이지만 유명 관광지나 문화재에 굳이 자기 이름을 새긴다든지(제발 이런 짓은 그만하자), 자주 가는 허름한 분식집 벽지에 언제 누가 왔다 갔는지 쓰는 우리네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말이다.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쓴다는 것도 흥미로운 기록이다. 내가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 생각한 것, 떠오르는 것을 차곡차곡 글로 채워나가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니까. 과연 지금의 나는,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을까. 한 명, 한 명 반짝이는 역사가 채워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와 우리의 이 순간이 망실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1988년 뒷산과 밭에 사과나부를 심으며 할아버지가 남기신 메모. 언제 어떤 나무를 얼마나 심었는지, 누구의 공이 컸는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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