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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글쟁 Oct 16. 2020

어린 날의 골목

나에게 일곱살의 시간이 참 좋았나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철 없던 일곱살 그 때가 떠오르니 말이다.

내가 일곱살 때 우리 부모님은 횟집을 하셨다. 이 지역 최초의 활어 횟집. 수 십년 전이었지만 우리 횟집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자리 하나라도 예약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나는 횟집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다만 그 횟집 건물은 오촌 당숙부의 건물이었고, 횟집을 하기 위해 우리집은 당숙부 댁의 작은 단칸방을 얻어서 살았다.


작은 나무문을 열면 바로 가스렌지 하나 있는 작은 부엌이 나왔고 문 옆에는 수도꼭지가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서 세수를 했다. 그 부엌에서 문 하나를 두고 방 한칸이 있었다. 엄마, 아빠, 오빠, 나. 우리 네 가족은 그곳에서 지냈다. 화장실은 따로 없어서 상가건물에 공용으로 쓰는 푸세식 변소를 이용해야만 했다. 


비가 철철 내리는 어느 날 밤에 똥이 마려워도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손전등을 들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변소에 쪼그려 앉아 똥을 눴다. 엄마는 밖에서 손전등을 비추고 내가 똥을 다 눌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인근 초등학교의 병설유치원을 다녔던 나는 언제나 즐거웠다. 유치원에 다녀와서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옆 집 혜령이와 선희와 노느라 하루가 다 지나갔었다. 우리집은 시장 한 가운데 있었지만 내 또래 아이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우리 가족의 집은 작고 허름했지만 나의 일곱살은 즐거움이 풍부했다.


시장 한 가운데 살던 친구들 집은 참 다양했다. 선희네 아빠는 소파가 가득 놓인 큰 방이 많은 가게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룸싸롱이었다. 우리는  그 큰 방을 들락날락거리며 잘도 놀았고 그 건물 옥탑방에는 늘 젊은 이모들이 많았는데 우리들을 참 예뻐해줬다. 혜령이네 집은 유아용품점을 했는데 일학년을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중간에 부설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우리는 바로 옆집에 사는데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사실이 너무 이상했다.  


나는 지금도 일곱살 내가 살던 이 골목을 종종 지나다닌다. 이틀 전에는 우리가 살던 집 골목을 들여다 보았다. 낡긴했지만 붉은 바닥 블록도 똑같고, 내가 살던 단칸방 문도 그대로였다. 새로 페인트 칠한 문이 참 작아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일 학년 때였다. 어느 날 아침, 18색 크레파스가 다 부러지고 닳아서 엄마에게 새로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크레파스를 모조리 다 쓰기 전에는 절대 사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나는 붉은 블록 골목에 서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 날은 마침, 전날에 시골 할아버지댁에서 자고 막내 고모가 아침에 나를 집에 데려다 준 날이었다. 

고모는 엄마한테 혼나고 훌쩍거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크레파스를 사라며 용돈을 쥐어주셨다. 나는 문구점에 가서 32색 크레파스를 샀다. 평소 쓰던 크레파스보다 두 배나 많은 색을 가진 큰 크레파스를 가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크레파스를 새로 산 날, 나는 내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서 학교 사물함에 넣어뒀다. 


슬프게도 나의 크레파스는 내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자물쇠도 없는 서랍식 사물함에 넣어둔 나의 크레파스는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생님께 누가 내 사물함에서 크레파스를 꺼내갔다고 말씀드렸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마음 껏 색을 칠해보지도 못하고, 32색을 한 번씩 써보지도 못했는데 나의 크레파스는 그렇게 나를 떠나갔다. 나를 떠나간 크레파스는 누군가의 손에서 형형색색의 색을 뽐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 골목을 생각하면 고모가 사준 32색 크레파스가 생각난다. 


동심은 어려운 환경과 별개였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우리집은 화장실도 없는 단칸 셋방이었지만 나의 일곱살은 건강했고 즐거웠고 신났다. 룸싸롱집 딸이랑 그렇게 놀았지만 나는 아무런 편견도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고 잘 자랐다. 

어린 날의 그 골목에는 지금도 일곱살의 아이가 뛰어 논다. 내가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아이는 언제나 그 골목을 드나들며 뛰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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