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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pr 24. 2023

물이 내 몸을 감싸며 끌어당기는
마술

히사이시조 영화음악 콘서트-생애 처음 오케스트라 들은 건에 대하여

클래식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쯤으로 기억된다. 정재형의 앨범 'Le Petit Piano'를 한참 반복해서 들으며 공부했던 게 선명히 기억난다. 아니, 공부는 했었던가. 나에게 남은 건 수학 공식이 아니라 피아노 선율이 표현한 여름과 사랑이었다.

피아노가 광대한 음역대를 가지고 있기에, 다채로운 상황과 감정,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생각한다. 어떻게 소리를 하나하나 엮어 계절을 표현하고 마음을 표현할까. 그 고민과 함께 피아노 곡을 듣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잠시 잊은 적도 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어떤 곡이 있는지 찾아보고 틀어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가 좋은 클래식 곡을 추천해 주었다. 그걸 따라 들었다. 그때부터 피아노 곡을 넘어선 클래식을 들었다.


나는 클래식 FM의 애청자이다. 라디오에서 항상 새로운 클래식을 만난다. 어느 날은 현악 4중주, 어느 날은 첼로 혹은 플루트 솔로, 또 다른 날에는 하차 투리안의 '가면무도회'와 같은 웅장한 서사가 담긴 음악을 듣는다. 출근할 라디오를 듣고 가면 마치 선율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어진다. 첼로의 가볍지 않고 진중한 소리를 들을 때면 조용한 도서관이 생각나고, 낭랑한 피아노 솔로를 들을 때면 카페를 가고 싶어 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일을 하러 가는 직장인인 것을... 클래식을 들으면서 영혼만 잠깐 갔다 오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 직장에 간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오케스트라는 충분히 웅장하지만 나에겐 2차원의 세계의 음악같이 느껴진다. 여러 현악기들이 합주를 해도 한 개의 바이올린 같고, 방금 들린 저 소리는 도대체 어떤 악기인지 짐작이 안 간다. 조금 더 디테일을 찾으며 듣고 싶은데 아는 게 없다. 누가 어떤 제스처로 악기를 연주하는지, 이건 몇 대의 플루트가 연주하는지, 저 소리는 어떤 악기들의 합주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음악 감상에 대한 아쉬움을 마음에 담고 있을 때쯤, 내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음악 히사이시조의 영화음악 콘서트를 가게 되었다.


히사이시조의 영화 음악은 그저 BGM으로 듣기 아깝다. 사운드 트랙을 모두 찾아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인물의 감정, 느낌, 풍경이 머릿속에 살며시 재생된다. 지금까지는 그 정도로만 감상했다. 영화가 생각나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듣다가, 드디어 영화 음악 콘서트를 가게 되었다. '딱 영화가 생각나는 재미일 것이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주물럭 거렸다. 모든 관현악, 타악기들이 함께 소리를 '쾅'하고 낼 때면 내 심장이 확 쪼그라들었고, 바이올린이 미세하면서 울듯한 선율을 내면 내 마음이 물로 흘러가 버렸다. 목관악기는 섬세하면서도 낭랑한 소리를, 금관악기는 사람을 압도할 자신감이 깃든 소리를, 타악기는 운명을 결정하는 듯한 근엄한 소리를 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연주를 할 때, 비로소 음악으로 하나의 이야기, 세계가 만들어졌다. 단지 영화의 스토리에 기댄 것이 아닌, 그 합주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정갈한 세계였다.


첫곡 '나우시카'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때가 기억난다. 그전까지 뭉쳐진 상태로 일렁이던 눈물이 '펑'터진 것이다. 안 그래도 '나우시카'에 나오는 '바람의 전설'의 멜로디가 구슬픈데, 오케스트라가 합주하면서 들려주는 정갈하고 다듬어진 선율이 나를 잡고 흔들었다. 그 합주의 섬세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고생한 나를 위한 정성스러운 선물 같았다. 정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공연은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도 선사한다. 심벌즈는 어떤 제스처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소리의 비장함이 달라지고, 여러 타악기를 한꺼번에 관리하는 연주자는 바삐 움직이며 음을 넣어준다. 콘트라베이스는 소리가 가볍게 날아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무겁게 중심을 잡으며 바쁘게 연주하고, 1 악기는 누구인지, 2 악기는 누구인지, 이 선율은 어떤 악기의 조합인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듣게 되면, 웬만한 영화 못지않게 눈이 바빠진다. 지휘자의 손길은 악기 소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악기의 소리의 강약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은 10분처럼 금방 넘어간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한 '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을 그들만의 개성 있는 해석으로 연주한다. '히사이시조 영화음악'을 비롯하여 '블록버스터 음악', 여러 애니메이션 OST 등의 곡을 연주하며 사람들에게 트렌디하게 다가간다. 그러면서 놓치지 않는 것은 '클래식 감상의 재미'다. 이런 대중적인 공연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클래식 팬으로 만든다. 이 연주를 계기로 나 또한 여러 공연을 찾고 들을 생각이다.


그날 내가 들은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살아있는 물, 바다와 같다. 조용히 내 앞에서 왔다 갔다 넘실대다가 어느 순간 파도로 다가와 내 팔을 잡고 풍덩 빠뜨리게 한다. 합주로 나오는 선율은 내 온몸을 타고 감싼다. 그것은 마치 물의 부드러운 일렁임 같다. 그렇게 흠뻑 빠져 듣고 느끼다 보면, 다시 육지로 와 있다. 하지만 몸 곳곳에, 머리와 마음 곳곳은 촉촉한 물기가 남아있다. 난 그 촉촉함으로 하루를 버티고, 이틀을 버텨내, 수많은 시간을 버텨낼 것이다. 그 물기를 안고.


다음 목표는 낭만주의 거장 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공연이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 들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또 치이고 힘들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담고 공연장을 가면, 난 또 합주의 아름다움을 듣고 일렁였던 마음을 터트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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