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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Oct 27. 2020

너에게 배웠다

아이가 자라면 나도 함께 자란다, 자랄 것이다.

  민우(가명)는 발음이 부정확해서 언어치료사인 나에게 온 7살의 남자아이였다. ‘야, 여, 요, 유, 여’ 등의 이중모음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했다. 유치원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이름이 ‘명근이’ 인데 늘 ‘멍근아’ 라고 불러서 명근이도 섭섭해 하고 친구들도 그 발음을 따라하고 정확한 발음을 하지 못하는 민우를 놀린 것이 나에게 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발음의 경우, 다른 동반장애가 없다면 반복연습 밖에는 왕도가 없다. 민우는 발음(현장에서는 ‘조음(噪音)’이라고 함)이 부정확한 것에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라포(rapport, 친밀감)형성 후에는 연습모드로 들어갔다.


  이중모음 발음에 문제가 있는 경우 그 목표발음을 계속 연습하면 된다. 연습방법은 사실 영업기밀인데, 민우가 친구 명근이의 이름을 갑자기 발음하려고 하면 ‘멍근이’가 되기 때문에 ‘미영근’ 이라고 풀어서 반복연습을 한 뒤 입에 붙게 하면, 그 다음엔 조금만 신경써도 ‘명근이’라고 발음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연습이기 때문에 ‘미역’ 열 번, ‘미영’ 열 번, ‘미영근’ 열 번, ‘미영근아(명근아)’ 열 번. 이 순서로 잘 되면 ‘미영’ 구간을 짧게 해서 ‘명근’이로 발음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우유, 여름, 연, 별, 병, 귤, 겨울, 혀, 휴지’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 중 이중모음이 들어간 단어를 연습하는 것도 병행해야 했다. 여기에 단 몇 줄로 적었지만 이 과정이 쉽지 않았다.


 민우는 이미 한글을 뗐고, 그 글씨의 발음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정확한 발음이 스스로도 거슬렸던 것 같다.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빨리 고쳐지지 않고, 연습이 늘 반복되다보니 연습을 피하려고 화장실이 급하다거나,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의 소원대로 하자는 등 여러 가지 꾀를 부렸다. 민우의 경우 연습만 성실하게 하면 몇 개월 안에도 종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친구이름 알려주기, 같이 놀이할 때 삐약이, 야옹이, 형아 등 이중모음 들어간 단어 말하기, 반복연습 10회 성공하면 비타민 1개 등으로 구슬려가며 연습을 유도했다.


 보통 언어치료 1회기는 40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르고 달래며 연습을 해도 30분이 넘어가면 몸을 베베꼬고 난리가 나긴 한다. 그래서 민우어머님과 상의하여 민우맞춤형 특단의 조치를 마련했다. 주2회씩 2주간 총 4번의 수업동안 민우와 함께 세운 목표를 달성하면, 당시에 민우가 한창 좋아하던 슈퍼윙스 캐릭터 장난감을 선물로 주기로. 

 마침 어머님께서도 민우 생일선물로 생각하고 계셨다며 하나 더 사주는 셈 치겠다고 하셨다. 이 소식을 들은 민우는 결의를 다지며 열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님이 들으시기에도 발음이 많이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하셔서 치료사인 내가 다 뿌듯했다.


 그 날은 민우가 유난히 산만하고 장난이 심하기도 해서 다른 날에 비해 놀이시간도 많이 줬고, 평소 연습을 마치면 주곤 했던 비타민도 하나씩 더 주겠다고 어르고 달랬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치료실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치료실 밖에서 기다리시는 엄마를 잠깐 만나고 오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엄마 앞에선 멋진 아들이고 싶었는지,

 “오늘 피곤해? 그럼 오늘은 빨리 가고 내일 모레 15분 더 할래?”

라는 엄마의 제안에 민우는

 “아니야, 끝까지 할 거야.”

하고 다시 치료실에 들어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다시 자세가 흐트러졌고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민우야, 왜 울어? 오늘 끝까지 하고 가기로 약속했지?”

 “아아아아악!!”

 하며 책상위에 있던 책들을 던졌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민우를 내 무릎위에 앉히고 단호하게, 사실은 혼내며 말했다.


 “민우야! 이렇게 우느라고 연습 안하면 오늘 끝까지 해도 내일 모레 15분 더 할거야! 알았어?”

 “쉬할래!!”

 이제는 협박이다. 나도 지지않았다.

 “안 돼!”

 “쉬한다고!!”

 “안 돼! 그냥 여기서 싸!”

 “연 습 한 다 고!!”


 순간 나는 아이를 놔주었다. 내 몸에 힘이 확 빠졌다. 연습하겠다는 말을 쉬하겠다는 말로 잘못 알아듣고 애를 잡은 것이다. 그때 확 풀어졌던 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다.


 민우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히고 남은 10분간 했던 발음연습은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그래서인지 오류빈도도 확 줄고 명확하게 발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일이 기점이 되어, 그 다음부터는 단어수준 뿐 아니라 문장수준에서도 발전적인 모습을 보였고, 민우는 내가 언어치료사로 일하는 동안 가장 단기간에 종결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때 내가 몰던 차는 중고로 산 베르나였다. 베르나는 100km/h만 넘어가도 핸들이 덜덜 떨렸고. 소음도 커졌다. 그런 베르나에게 150km/h이상의 스피드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큰 고장 안 나고 내가 버릴 때 까지 살아 있어주는 정도가 내가 베르나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민우에게도 그랬다. 그 당시에 민우에게 바라는 것이 ‘여름에는 꽃이 활짝 펴서 어여뻐요.’같이 목표발음으로 구성된 문장을 유창하게 발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수업 때 했어야 하는 ‘명근아’ 열 번 반복연습을 완료하는 것이 민우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혹은 세상이나 신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놀라운 수준의 것이 아니었겠다는 것.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괜찮은 수준 정도, 내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을 기대하지 갑자기 내가 전교1등을 하고 서울대에 간다던지, 원어민처럼 영어를 술술 말한다던지 하는 무례한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어렸던 날에 내가 나에게 실망하고 괴로워했던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어’,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어’ 라는 말에 도취되어 뭐든 다 할 수 있고 다 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노력만 한다고 다 가능한 건 아닌 세상을 나는 오해했던 것이다.


 같은 자동차라고 해도 체급이나 연식에 따라 성능이 다르다. 중고차에게 새 차 같은 엔진이나 속도를 기대하면 안 된다. 나는 내 차에게 왜 스포츠카 만큼 속도를 못 내냐고 채찍질하지 않았고, 왜 외제차만큼 예쁘게 생기지 않았냐고 원망하지 않았다. 열심히 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베르나에게 자동차의 ‘기본’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 베르나는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내 목숨을 잘 지켜주며 나와 함께 하다가 결혼하면서 좋은 가격에 팔았다. 그렇게 ‘기본’을 다 해준 것이 충분했고, 고마웠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뭘 가지고 있는지, 나는 뭘 잘하는지, 내가 나를 아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잘 알았다면 남이 잘하는 모습, 남이 뭐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응원했을 것이다. 부러웠을 수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이나 고민 없이, 남들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모습만 바라보며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했었다.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는 게 맞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해야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으니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나는 괴로울 수밖에.


 이랬던 나에게 “연습 할래”라고 말했던 어린 민우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기적적인 변화나 발전을 바라지 않았다. 이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성실히 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칭찬했고, 가끔은 비타민이나 초코렛 등의 선물도 주었다. 목표를 다 이루고 나서 칭찬하고 선물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날 그날, 그 단계의 성취만으로도 충분히 보상했다. 그 성실함이 모이면 민우어머니와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른인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겠지. 내가 해야 하는 그 날의 숙제나 공부, 심부름 등을 해낸 것만으로도 칭찬해주셨고 가끔은 용돈도 주셨다. 부모님은 나에게 거대한 것, 놀라운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다. 그날의 건강과 안전이면 충분했다. 택도 없는 기대를 했던 건 오히려 나였지 부모님은 아니었다.


 민우는 내가 만났던 아이들 중 가장 단기간에 종결했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 아이 중 한 명이다. 치료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오던 수줍은 모습의 민우와 오실 때마다 고생 많으시다며 주스를 건네시던 따뜻한 미소의 민우 어머니. 이제 종결해도 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이렇게 빨리 좋아질 줄은 몰랐다며 연신 감사하다고 웃으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때보다 더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은 자괴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민우를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을 힘들어하긴 했어도 성실히 해냈던 민우. 할 수 있는 것의 단계가 조금씩 올라가도 노력하며 해냈던 민우. 조급해하지 않고 그 단계를 꼼꼼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왔던 민우의 언어치료사였던 나.

 그때보다 나는 더 어른이 되었기에 나에 대해 잘 파악할 수 있고 내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정하는 것도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직은 창창하게 남아있을 나의 날들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치의 성실함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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