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실 문을 닫고 있는데도 멀리서 "으에에에에에에에에아아아아~~~~악 컥"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현(가명)이가 오는 소리. 어느 날은 솜사탕처럼, 구름처럼 조용히 교실앞에 와있어서 깜짝놀랄 때도 있었는데 그런 적은 2년 동안 다섯 번이 채 안 되었다. 늘 저런 사이렌같은 소리로 등장했다.
아이들의 시간표 변동이나 종결로 비어있는 시간이 생길 경우에 대기자명단을 보고 순위가 된 대기자에게(정확히 대기자의 부모님) 연락을 해서 언어치료 시작여부를 결정한다. 보통 한 군데만 대기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이미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 내가 속한 복지관의 대기를 취소하는 경우도 있고, 거리나 비용등을 따져 다른 곳의 치료수업을 관두고 이쪽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저런 사연들을 가진 대기자들 중에 서로 스케쥴이 맞는 아이가 신규아동이 된다.
빈 시간이 생겨 대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리려고 대기자명단을 열었는데
'김호정 선생님 수업 원함'
띠용-
언어치료사생활 12년 동안 비고란에 저런 문구가 써 있는 것은 처음봤다. 무슨 일이지. 아직 순위권의 아이는 아니라서 궁금하기만 할 뿐 전화를 해볼 수는 없었는데, 그 날은 유난히 다른 곳으로 이사갔거나(보통 대기신청을 하면 2년은 걸린다) 이미 다른 곳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하여 줄줄이 대기취소가 되다보니 비고란 저 문구의 주인공에게도 전화할 순서가 왔다. 전화상으로는 별 다른 느낌은 없었고, 최대한 빠른 수업을 원하셔서 그 다음주부터 바로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으에에에에에에에에아아아아아악~~~~~"
아, 이 아이가 지현이구나.
복지관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최대한 받고 있는, 이름만 몰랐지 늘 오며가며 스쳤던 그 발성이 남달랐던 친구였다. 초기 면담 때부터 종결할 때 까지 거의 활(동)보(조)선생님이 오셨다. 지현이를 만난 지 3년이 넘었다고 하시더니 정말 지현이에 대해서는 전문가 이상이셨다. 어떻게 얼르고 달래야 문제 행동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지, 어떻게 도와주어야 보행이 조금은 더 편한지, 배고픔이나 불편함에 대한 표현은 무엇인지 등.
"제가 3년 넘게 지현이랑 여기 다녔는데, 선생님은 한 번도 안바뀌시더라구요. 그래서..."
내 이름을 콕 집어 대기하신 이유가 내가 장기 근속자라서 였나보다. 중간에 치료사 바뀌는게 큰 스트레스일 것이다. 적응하는데 오래 걸리는 아이라면 더더욱. 나는 이 곳 근무 1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관장님은 바뀌었지만 나는 안바뀌었다.
장애명을 정확하게 기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사실은 많다. 지현이의 경우가 그랬다. 뇌병변과 지적장애, 발달장애를 다 가지고 있었다. 한창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12세.
악- 소리를 내며 우는 것 외에는 다른 음성 언어는 사실 없는 상태였다. 떡국떡 정도를 씹을 수 있는데 그것도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뱉는 것도 어렵고. 영상이나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 흥미를 유도하는 것이 힘들었다. 소리를 잘 지르는 아이라서 소리를 길게 낼 때 입 주변을 만져주어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게 하면서 /마/소리를 유도했다. 그러다가 지현이가 손을 무는 등의 공격을 할 것 같으면 지현이의 손으로 얼굴을 만지게 하기도 했는데 자기 얼굴을 만지게 하면 덜 울고 전투력을 좀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현이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라 얼굴이 보이는 큰 거울 앞에 앉혀 놓으면 3-4분 정도 골똘히 보았다. 하지만 갑자기 손가락을 물거나 물다가 빼는 반동으로 팔을 휘두르기도 했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꼬집기도 했다. 그냥 잡는 것일 수도 있는데 순간적으로 악력이 너무 세서 꼬집는 것으로 느껴지고, 피하다가 긁히기도 했다.
더울 땐 더워서 그런가, 비올 땐 비와서 그런가 싶었는데 잡히고 꼬집히는 날들이 길어지면 나 뿐만 아니라 활보선생님이나 다른 치료선생님도 힘들어졌다. 치료사인 나는 치료 시간으로 정해진 40분만 견디면 되지만 활보 선생님은 그 보다 많은 시간을 지현이와 함께 해야 했기 때문에 어느 날은
"어우, 나 우울증 올 것 같아요. 어제는 진짜 얘 엄마한테 관두겠단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는데, 얘 엄마 눈에 멍이 든거야. 얘가 하도 손 물고 꼬집고 하니까 하지 말라고 붙들고 있었는데 머리로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내가 어떻게 관두겠다는 말을 해. 내일이면 나아지겠지, 다음 주면 나아지겠지, 그러고 있어요."
일흔이 가까우신 지현이의 활보선생님은 작고 아담하신 분인데, 지현이는 보통 체격이었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중이었기에 금방 활보선생님의 키를 넘어섰고 늘 지현이의 가방을 메고 지현이의 팔짱을 끼고 오시는 모습이, 지현이에 밀려 넘어지시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아이고, 선생님. 여기좀 봐."
활보선생님의 양쪽 팔이 다 멍이었다.
"어쩜 이럴까. 아니, 자기 도와주는 사람은 알아봐야 할 거 아니야. 다 그렇잖아. 자기 주인은 알아보잖아. 1-2년도 아니고. 아... 여름 지나고 가을인데."
그 해가 유독 그렇게 힘들었다. 지현이 수업이 있는 날이면 전날 밤에도 아침에도 출근하는 길도 좀 두렵고 무서웠고, 문자 소리가 나면 혹시나 다른 일정이 생겨서 못온다는 지현이 부모님의 문자가 아닐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날은 없었다. 늘 성실하게 출석했다.
힘든 날은 길었고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던 날은 짧았다. 어느 날 활보 선생님과 함께 오셨던 지현이 어머니가 울 때도 엄마 하면서 울 때가 있고, 누워있거나 앉아 있을 때 옹알이 같은 소리를 내는데 흥얼거리기만 했던 소리가 아니라 /마마마마/,/머머머머/하는 소리를 낸다며 제법 말 소리 같은 소리를 낼 때가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자음소리 산출이 전혀 없었던 지현이였기 때문에 1년에 걸친 노력이 이 정도라면 사실 많은 발전이긴 하다. 하지만 힘들었다. 가끔 보이는 발전된 모습이 과연 지속적일지 어느 날 갑자기 퇴행할지 퇴행하더라도 다시 튕겨 오를 수 있을 지, 발전에서 더 발전할 수 있을지, 전혀 예상이 불가능했다.
지현이 어머님은 활보 선생님의 정기적인 한의원 진료비를 대주시고, 복지관에 동행하시는 날이면 나에게 커피도 주시고, 활보 선생님은 김장을 많이 하셨다며 김치도 주실 정도로 친절하셨지만 지현이는 방향을 알 수 없는 그래프를 그리다가 오래 대기하셨던 감각통합치료로 옮기신다면서 종결했다.
엄밀히 말해 2년간 가시적인 발전은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씩 보였던 /마마마마/하던 소리도 종결 즈음엔 나타나지 않았고, 발성이 목을 짓이기는 소리로 바뀌어서 자음 소리를 유도하기가 어려웠다. 물건 주고받기, 잡기/놓기, 질감이 다른 물건으로 촉각 자극 등의 활동으로 바꾸었다.
지금도 지현이는 내가 있는 복지관에 온다. 다른 치료수업을 받기 위해, 수업이 없어도 경사로가 길게 있기 때문에 걷기 운동을 위해. 지금도 지현이가 올 때마다 영락없이 지현이의 사이렌소리가 울리고, 지현이의 사이렌소리가 울리면 나는 왠지 모를 guilty한 기분을 느끼고 요즘 지현이의 컨디션은 어떨까 잠시 지현이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