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절친의 동생에게 소개받은 남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자기가 그녀에게 소개받은 원빈(이름이라도)이라며, 본격 소개팅 및 선보기 3년 만에 문자로 첫 인사 튼 건 이 남자가 처음이다. 소심한가, 사투리를 쓰나, 목소리가 이상한가..여러 추측들이 머릿속에 난무했지만 멀쩡한 사람이니깐 절친동생이 소개해줬겠지 하고 생각했다.
몇 번의 문자핑퐁끝에 토요일 6시에 선릉역에서 보기로 했다. 구체적인 장소는 정하지 않은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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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하는 날.
보통 소개팅 전 날에 다시 연락하며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던데 이 남자는 연락이 없다.
4시다..까먹었나..하지만 내가 먼저 연락할 순 없다. 난 여자니까!
일단 엄마한텐 친구를 만난다며 집을 나왔고 4시 반경 문자가 왔다. 6시에 선릉역 1번 출구에서 보자며.. 어이없었다. 만나기 1시간 반 전에 문자를 보내다니. 지금까지 문자에 오타나 철자법에 틀린 것이 없었으므로 참아본다. 나는 철자법 틀리는 거 진짜 싫어한다.
1번출구로 나왔다. 6시다. 춥다. 아무도 없다. 신한은행 ATM기기 있는데로 들어가있었다. 그래도 춥다. 문자가 왔다. 5분쯤 늦을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얘 뭐야 싶었지만 참아본다. 지금까지 참았으니.
5분쯤 지나자 소개팅남한테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며.
신한은행앞에서 만났다.
근데 진짜 얘 뭐야..
청바지에 후줄근한 후드티에 코트차림이다.
그간의 소개팅남들은 수트차림, 세미정장 정도였지 청바지에 후드는 1도 없었다.
가난한가보다, 생각했다.
남 버전-
같은 교회다니는 동생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별안간
"오빠 소개팅할래요?"
이랬다.
완전 뜬금포였는데, 사실 나야 고맙지.
"누군데?" 물어봤더니
"우리 언니 친구요." 라고 했다.
흠. 그 동생의 언니는 나도 아는 누난데, 1살 많은.
그럼 누나의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는건가, 아님 내가 그 누나의 나이를 잘못 알고 있나, 순간 고민은 좀 됐지만 날 잘 봐줘서 소개팅을 해준다 한 것일테니 일단 받겠다고 하고, 조심스럽게 그 동생의 언니 나이를 물어봤다. 그 동생에겐 둘째언니가 있단다. 다행이다. 근데 81. 좀 많은 감은 있지만 한 번 만나보지 뭐, 내 친구 격이도 얼마 전에 생긴 여친 81이라던데.
연락처를 받았다. 어떻게 첫인사를 해야할 지 모르겠다. 전화로 하면 좀 부담스러우려나. 문자로 해볼까.
문자를 보냈다.
답이 왔다.
다행이다.
담주 화요일에 볼까 했는데 바쁜가보다.
토요일이 좋단다.
쿨하네.
선릉역에서 보기로했다. 검색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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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어디로 가야할까.고물 노트북은 말을 안 듣고 스맛폰으로 계속 검색중이다. 뭘 좋아하려나.
일단 파스타집 하나, 한식집 하나를 봐두었다.
선릉역 근처는 회사들이 많아서 토요일엔 한식집은 문을 안열지도 몰라. 전화해봐야지.
다행이다. 오늘도 영업한단다. 벌써 4시네. 연락해봐야지.
뭘 입지. 양복을 입으면 너무 부담스러우려나. 내가 가진 A급 청바지와 A급 후드티를 입어야지.
출발!
앗! 눈 앞에서 마을 버스를 놓쳤다. 젠장. 지하철로 가야겠다. 4430은 왜이리 안 오냐.
윽, 늦겠다. 어휴. 문자를 보냈다. 춥단다. 근데 이 여자 좀 무서울 것도 같다. 전화했다. 신한은행에 있단다.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는 아니다. 좀 무서울것 같다.
1번 출구.
간다간다간다
간다간다
간다
다왔다
파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다.
저 여자인가.
혹시나 아니면 안되니까 통성명을 했다.
이나영 맞단다.
81이라고 들었는데 어려뵌다.
나이를 다시 물어봤다.
81맞단다. 아쉽다. 더 어렸으면 좋았을 것을.
다시, 나 버전-
혹시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 통성명을 하잔다. 추워죽겠는데 여러가지 한다.
이나영이라고 했다. 자기는 원빈이란다. 반갑다. 근데 춥다. 레스토랑을 봐놨다고 했다. 근데 거긴 7번 출구랜다. 뭐야,
"그럼 왜 1번에서 보자고 한거에요"
"1번이 first니까요."
이런다. 아오, 추워 죽겠는데 장난해?
초면부터 화를 낼 순 없다. 참아보자.
그동안 내가 이런 매물시장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제일 키 크고 제일 날씬해.(늘 배 나온 두리두리한 분들..;;)
그러니 일단은 웃으며 여유를 갖자갖어!
레스토랑을 찾았다. 문을 닫았다. 어이없다. 사진첩 찬스를 쓰게 해달란다. 위트있네. 빨리 쓰라고 했다. 다시 왔던 길을 걸어 코벤트가든(?)이라는 곳에 갔다. 밝고 따뜻했다. 음식도 맛있고.
소개팅남이 물었다.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이 뭐에요?"라고 묻길래
"엄청 많은데..."라고 했더니 일단 말해보란다.
한 스무가지를 쭈욱 말했다.
"다는 힘들겠고, 그 중 몇 가지는 제가 노력할 수 있겠네요."
읭? 얘 나한테 반했나? 라고 생각했다.
다시, 남 버전-
뭐 먹고 싶냐고 했더니 파스타란다. 아 난 밥먹고싶은데.
블로그에서 유명한 파스타집을 찾아놨다. 웁스. 문 닫았다. 토요일 저녁에 이게 웬 날벼락. 식은땀난다. 오늘 난 늦었고, 내가 찾아온 식당도 문을 닫았고. 어휴. 못 쳐다보겠다.
다행히 오는 길에 하나 더 찾아 놨는데 거길 가야겠다. 화도 안내고 총총 잘 걸으며 날 따라온다. 고맙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소개팅녀가 내 앞에 앉았다.
예쁘다. 오와. 어두운데서 봐서 잘 몰랐는데. 너무 예쁘다.
나 때메 기다리고 오래 걷고 했는데 짜증도 안내고 웃고 있다.
아 천사인가보다. 너무 예쁘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오랫동안 많이 생각해놨나보다. 한 스무가지는 넘는것 같다.
그래, 너처럼 예쁜앤 눈이 높아야돼. 나도 모르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 잘 먹는다. 예쁜데 잘 먹는다.
1. 이 남자는 검색하는 식당마다 문 닫게 하는 재주가 있어서 맛집이라고 검색해놓은 곳에 찾아가면 건물앞에 "임대"라고 써 있거나, 찾아간 날은 영업을 안하는 날이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한 곳들이 많았다. 어떤 날은 검색해놨던 식당도, 커피를 마시려던 까페도 다 문을 닫은 경우도 있었다. 콤보날리심. 그런 징크스 때문에 검색하고나서 꼭 전화해서 영업하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가 지금은 아예 검색을 안하신다. 집밥돌이. 아 귀찮아. 이래서 결혼은 연애의 실패임.
2. 이 남자는 우주 최강의 패션테러리스트로서 당시 A급이라며 입고 나왔던 후드집업은 이마트에서 2만원주고 산거라고 한다. 진심으로 A급이라고 생각함.
3. 이상형은 소녀시대의 수영이라고 했고, 나이는 81~89정도를 생각했다고 했다. (81은 나 땜에 끼워놓은 것 같다) 네, 알겠습니다.
4. 이 남자의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넌 좋겠다. 늦은 나이에 젊은 남자 만나서."
1살 차이라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이 남자가 그렇게 금욕적인 남자인지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금욕적. 청렴(?)하게 살게 해줘서 고맙다. 나는 그대로다. 누가 만지질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