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할 때 같은 학원에서 친해진 친구는 피아노 전공의 예고출신이었다. 어쩌다가 친해진 건지 잘 기억은 안난다. 벌써 20년이 된 기억이라 그렇게 혹독했던 시절이 가물가물해진 것이 오히려 신기한데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세 달 씩 3학기제로 운영되었던 학원에서 첫 학기에만 같은 반이었고 나머지 두 학기엔 다른 반이 되었었는데 첫 학기에 친해진 인연으로 다른 반이 되어서도 옆 교실로 오며가며 마주치고 수다떨고 하면서 계속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나는 재수도 실패나 다름없었지만 삼수해서 더 망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냥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삼수를 하겠다고 했다.
재수를 마치고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친구는 본격적인 삼수를 시작하기 전 2월 말에 당시로서는 고급레스토랑이었던 TGI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기로 했다. TGI에 들어서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내 친구를 알아보시더니 내 친구의 손을 막 잡으시고는
"어머, 혜교(가명)야! 얘기 들었어. 괜찮니? 어우, 서울대 갈 애가... 아줌마가 응원할께."
하시면서 주머니에 겹쳐져있던 만 원짜리 몇 장을 친구에게 쥐어주셨다.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시 울었고, 나는 얘가 대단한 애였구나 생각했으며, 그래도 우리는 맛있게 식사를 하며 2001년 3월을 맞이했다.
드문드문 연락은 했지만 잘 만날 수는 없었고 수능이 가까워지던 날에 시험 잘 봐라, 응원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수능이 끝나고는 작년보다 잘 나온 것 같다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고, 본격적으로 노는 겨울을 맞았던 기억이다. 놀면서도 실기준비는 착실히 했는지 SKY는 아니지만 버금가는 명문대 음대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나의 질투는 시작되었던 것인가. 나도 삼수할걸 그랬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또 다른 1년을 알 수 없는 미래에 바치는 대신, 알 수 없는 미래인 것은 마찬가지긴 하지만 내가 만들 수 있는 미래에 바치기로 했던 것 같다. 아, 아니다. 그냥 공부고 입시고 다 귀찮았다. 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고,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명문대에 갈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명문대에 갔다면 선택지가 더 많아졌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언어치료사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늘 내가 만든 현실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친구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클래식음악을 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도 있는 부정적인 느낌, 예를 들면 잘난 척이랄까, 공주병 같은, 현실감이 없달까, 뭐 그런 것들이 없었다. 대체적으로 코드가 잘 맞았고, 유복하게 자란 만큼 감정이나 생각의 표현도 여유있고 예의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랬다. 그래서 말이 잘 통했고 편했다. 같이 여행도 여러 번 다닐 만큼.
친구는 23살때 소개팅으로 만난 동갑인 남자친구와 30살에 결혼했다. 친구는 힘들게 명문대 음대에 들어갔지만 연주자로 살기는 싫다며 레슨을 주욱 하다가 결혼을 하면서 현모양처라는 오랜 꿈을 이루었다.
남자친구의 부모님 두 분 다 S대 출신의 교수이고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신혼집은 이촌동에 30평대 아파트. 전세이긴 했지만 걔 전세는 내 전세랑은 팔자가달랐다. 전세라고 다 같은 전세가 아니다.
내 친구는 남자친구가 금융권에 입사하고 1년 정도 있다가 결혼을 했고, 남편이 30대 후반이 되면서 '평생 할 일'을 찾고 싶다며 사표를 내고 경기도 북부에 큰 식당을 차렸다. 남편의 포부에 따라 친구도 북부로 이사를 갔지만 친정이 우리 동네인 덕분에 그다지 소원해지지 않고 교통하며 지냈다.
식당은 친구의 남편 혼자 차린 것은 아니었고 요식업으로 몇 차례 큰 성공을 거두신 시삼촌 분이 리드를 해주셔서 투자자 중 한 명으로 들어갔고, 투자를 했으니 직함이 사장이긴 하지만 실무를 익히는 마음으로 월급 200만원씩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 처럼 아이가 2명이라 4인가족인데 4인가족에게 200만원이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싶어 걱정을 했더니
"괜찮아, 다른 데서 돈 나올 데 있어서..."
하며 말끝을 흐리는데, 이 친구의 친정도 유복하니 용돈을 좀 주시나 싶었다. 친한 친구지만 다소 예민한 돈 얘기를 굳이 더 물을 순 없었고 사실 묻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작년, 아이들의 여름 방학기간에 친구의 집으로 놀러갔다. 적어도 나보다는 윤택하게 살았던 친구답게(?) 집에 들어서니 40평 가까운 집이라 속이 뚫리는 느낌도 있었고, 직구로 샀다는 택배박스들이 쌓여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장난감들이 시리즈별로 한 상자씩 있어서 하루 종일 놀면서도 영상을 보여달라거나 밖에 나가자고 조르지 않았다.
덕분에 친구와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카톡이나 짧은 전화통화로만 안부를 나누다 만나니 봇물터지듯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친구보다 한참 뒤에서 시작했지만 작게나마 집도 사고 차도 산 패기를 철없이 자랑하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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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 부자는 힘들어도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을.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다는 것을.
운영하고 있는 식당은 생각보다 수익이 나오지 않아 다른 지역으로 옮길까 고민중이라고 했고, 시어머니를 따라 부동산투자로 돈을 벌까도 고민했다고 했다.
"부동산투자? 그건 목돈이 좀 있어야하는거 아냐?"
"그렇지, 그냥 돈 나올데가 있긴 해서."
이번엔 부동산 투자가 가능할 만큼의 돈이 나올 데가 어디인지 궁금했다.
"어디서 나와?"
"아버님이 OO터미널 지분이 있으신데, 그걸 우리한테 증여해주셨거든."
"정말? 증여세 엄청나지 않아?"
"많지. 전세금 모아둔거 있으면 달라고 하시더라고. 그렇게 해서 받았어."
그러면 그렇지. 한 달에 200만원으로 어떻게 사나 했다. 게다가 친구의 아이는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직구로 샀다는 브랜드들이 갭이나 올드네이비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우리는 외식을 금하고, (남편만)미니멀리스트로 살며 꾸역꾸역 돈을 모아 차를 바꾸고 돈이 생기면 대출부터 갚아나가며 산 집은 19평이었는데.
"너는 여행을 자주 다니잖아. 우리는 작년에 일본다녀온 게 유일한 여행이었어."
친구가 말했지만, 여행을 아낀다고 우리가 무슨 터미널의 지분을 갖거나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거나 직구로 명품 옷을 살 여유는 없다. 그런 여유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성격상. 각자의 성격대로 사는건가.
이번에 전세값 올릴 때는 친정에서 도와주셨으면 했는데 또 시댁신세를 져야했다며 거의 매주 시어른들을 찾아뵈며 특별한 날이든 그렇지 않든 선물과 식사대접을 한다고 했다. 어쨌건 친구 부부의 힘으로 이룬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 그렇게라도 보답해야 할 것 같다며.
선물과 식사를 대접해도 신세를 질 수 없는 나의 양가를 미워해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 나는 전셋집에 살 때도 전세값 올랐다고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생각 자체를 못했었는데, 안하기도 했고.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는 분위기같은 게 있었다. 모르겠다. 내 성격인지. 남편도 말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우리끼리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지금도 그러고 산다.
부모님을 통해 원활하게 돈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은, 내 입장에선 너무 부러운 일이긴 하지만 복이라는 생각이다. 진심이다. 집값이 최근들어 더 날뛰고 있지만 날뛰기 전이나 날뛰나 날뛰고 난 다음이나 월급쟁이든 자영업자든 '서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집값'은 늘 넘사벽이다. '미쳐'있다. 보통의 배포로 덤빌 수 있는 집값은 없다. 수도권에 대한 욕망을 접는다면 모를까. 그런 젊은이에게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의 공급처가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대출의 올가미에서 놓일 수 있고 자신이 버는 돈을 더 건설적인 쪽으로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복을 받은 사람이 유튜브나 TV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주변에 있다. 가까이에. 사실 이 친구 하나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복이 유난히 부러운 이유가 있다.
올해가 되던 작년 연말에 새해인사를 전하며 안부를 물었더니 9월에 식당은 접었고 남편은 오라고 했던 전 직장의 오퍼도 거절한 채 집에서 같이 지낸다고 했다. 친정은 우리동네라 자주 오가는데 보통 주말에 오가다보니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빼앗을 것 같아 연락을 못했단다. 사실 그렇다. 친정에 아이를 맡길 수 있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혼자 있고 싶지 굳이 친구를 들이고 싶진 않은 것은 나도 그렇다. 아마 친구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올해 9월, 아이는 계속 온라인 수업중이고 집에 있는 시간이 지겨워 친구네 집에 가볼까 싶어 연락을 했었다.
"내일? 음.. 아직 남편이 집에 있어서..."
"그럼 다른 편한 날은 없어?"
"음.. 남편이랑 상의를 해봐야 하는데, 내 친구 온다고 남편을 나가라고 하기가 좀 그래서..."
친구의 남편은 동갑이고, 친구의 긴 연애기간 동안 나도 같이 만난 적이 많이 있어 딱히 불편할 거라고 생각은 안했는데 유난히 남편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았다. 그럼 친정에 올 일 있을 때 우리 집에서 아이들과 만나자고 했다.
"그래, 나 다다음 달에 이사가거든. 그럼 좀 가까워지니까 그 때 더 자주 보자."
이사? 어디로 이사가지? 어디에 사는지가 어떤 그런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정말 궁금하다. 어디에 살고 어디로 이사가는지, 전세인지 자가인지.
"이사 가? 어디로?"
"이촌동"
"......."
사실 그 다음 통화내용은 잘 기억이 안난다. 아마도 잘 지내라는 끝인사였을 것이다.
집에 오는 내내 뭔가 말할 수 없는 막막한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뛰어도 보고 날아도 보고 열심히 하고 노오력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구나 싶은 그런 좌절감 비슷한 것도 느끼면서. 우리 집을 팔아도 전세로도 갈 수 없는 그 동네로 이사간다고. 게다가 집 안에 돈 벌어오는 근로자도 노동자도 없는데 이촌동으로의 이사가 가능하다고. 가능한 일이구나. 가능할 수 있는 일이구나.
모른 척 묻어 두었던 열등감인가. 얘는 집도 잘 살고 키도 크고 예쁜데 잘난 척도 안하고 말도 잘 통해. 비천한 나에게 맞춰주었던 것인가. 아닌데, 나 그다지 비천하지 않은데. 삶을 꾸미려고 하지 않아도 자꾸 그 친구의 삶은 안락하게 꾸며지는 것 같다.
이 친구의 팩트가 나를 찌른다. 신혼집이 이촌동의 30평대 전세아파트였다는 것, 덤벼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직장을 관둘 수도 있는 남편의 패기, 돈을 버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4인 가족이 윤택하게 살 수 있는 돈력, 심지어 이촌동으로 갈 수 있는 심한 돈력. 그게 전세일지라도. 얘는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 몇 억인거야.
부럽다.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의 공급처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고 편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매주 찾아뵙고 특별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베푸는 착한 마음을 가진 것 역시.
더 큰 것을 바라서 그러나 싶은, 좀 꼬인 시선도 나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 받고 내 할 말 하면서 살겠다는 나의 태도도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돈을 주지 않는다고 대접받지 못할 권리를 가진 부모는 없다. 그냥 내 마음이 갑갑할 뿐.
성탄인사와 함께 전에 살던 동네로 이사를 했으니 곧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 만나자. 마침 너에 대한 글 쓰고 있었다. 네이버에 친구네 단지를 검색해보니 정말. 친구가 가진 돈력부터 착한 마음까지 모두 부럽다. 능력이 있는 부모를 만난 건 너의 복이야, 라고 말하던 나에게 친구가 말했었다.
"난 누구의 도움없이 일궈가는 너네가 부러워. 짊어지고 가는 무게 같은 게 있어."
이 말을 들은 직후에는 좀 우쭐했다가, 어쩌다 이 말이 생각나서 곱씹다가, 내가 이 친구의 입장이라면 정말 나를 부러워할까 싶어서 더 마음이 삐뚤어지곤 했다. 나보다는 정신상태가 건강한 편에 속하는 것 같은 남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