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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Aug 05. 2021

10만원

한 때는 해보고 싶었던 어른같은 행동

 학령기 아이들 둘을 키우고 있는 나는 주말이 되면 근교로 나들이를 가기도 하지만 여의치 않은 날엔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을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내 친구들에게 "이모~"라고 부른다. 아이들의 이모인 내 친구들은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색종이도 사준다.


 나 어렸을 때도 친이모는 아니지만 이모라고 부르던 엄마의 친구가 있었다. 내가 7~8살이던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분이었다. 나는 그 이모가 오는 게 좋았다. 이모는 청바지에 청남방을 입고 지금으로 치면 커다란 에코백을 메고 선글라스를 머리나 옷에 걸고 다니는 멋쟁이였다.

 이름은 명식이. 고명식.

 나는 명시기모~라고 불렀다.



 이메일이 없던 시절에 '고명식'이라는 이름으로 편지가 왔던 날, 같이 살던 막내 삼촌이

 "형수님, 남자친구 있으신가봐요? 편지왔어요."

 라며 우편함에 든 편지를 갖고 들어왔다.


 "아~ 명식이 여자에요, 미국여행갔다더니 편지보냈네요."

 하며 저녁상을 물리고 웃으며 편지를 읽던 그 때 엄마의 분위기가 명식이모의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보통 부모님의 모임에 가면 누가누가 더 똑똑한가, 누가누가 더 리더십있나를 은연중에 평가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 이모는 비혼이었어서 그런지 우리 집에 오는 날엔 주욱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와 동생과도 상대해주고, 다시 엄마와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같이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인사를 나누고 배고파 질 때쯤 집을 나서곤 했다.


 이모랑 저녁도 같이 먹으면 좋을텐데 이모는 늘 저녁 직전에 갔다. 더 함께 놀면 좋을텐데 그게 늘 아쉬웠다. 하지만 이제는 멋진 곳이 아니라 시부모까지 같이 사는 집으로 친구를 부를 수 밖에 없는데 밥도 같이 먹지 못하고 한창 차 막힐 시간이 친구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엄마의 형편도, 그렇게 넉살이 좋은 이모였지만 식사는 피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골드미스인 이모의 형편도 이해가 간다.


 이모를 배웅하러 집을 나서는 걸 좋아했다. 이모는 우리 집에 오면 나와 동생에게 엄마도 잘 주지 않는 만 원짜리를 주었다. 내가 돈을 받으려고 손을 뻗는 찰나 우리 엄마가 갑자기 끼어들어 이모와 격투기 수준의 몸싸움을 벌였다.

 "돈 잘 버는 친구 둔 게 자랑스럽지도 않냐? 나 돈 쓸데가 없어!"

 "그럼 그냥 쌓아놔! 뭐하러 애들 줘!"

 "쌓아놓느니 애들 웃는거라도 좀 보자!"

 우리에게 돈을 주시려고 하는데 또 엄마가 막아서니 이모는 엄마를 밀고 우리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엄마한테 뺏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자주 만날 수 없는 이모였지만 가아끔 이모를 만나면 내가 주로 보는 동네 아줌마들(여자 어른)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자 어른이었기 때문에 신선하면서도 그런 여자 어른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괜히 자랑스러운 느낌도 있고 꼭 돈도 주고 가니까 한편으로 기다려지기도 했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바라던 어른상에 그 이모의 지분이 상당히 끼어있는 것 같다. 좀 멋있고 싶고 자기의 스타일도 있으면서 돈도 잘 벌고 잘 주는 사람. 하하.


첨부된 사진들은 모두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 위치한 <파네트리 제과명장 김영모>입니다. 


 얼마 전에 외국에 살던 친구가 가족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ㅋㄹㄴ를 이유로 하기엔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지도 꽤 오래되어 위험을 무릎쓰고 귀국했는데 자가격리 2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4단계가 되어버려 아이들을 떼어 놓을 수 없는 형편에 식사는 물론 차 한잔 마시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리 동네를 지나는 길이라며 카톡이 와서 급한대로 동네 놀이터에서 만났다. 혹시 몰라 남편과 아이들은 미션을 주고 마트에 보낸 상황이었고 우리는 봇물터진듯 지난 시간의 일들을 풀어놓았다. 아이들이 자랐고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 외에 특별한 신변의 변화가 없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ㅋㄹㄴ를 겪는 시간 동안 암투병을 하시고 사별을 하셨다는 엄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심장이 턱턱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그보다 더 오랫만에 만난 친구에게서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평이한 이야기를 나누다니, 오히려 역동적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날 따라 동네 개 모임에 나온 개들이 많았다. 개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을 다 무서워하는 나는 두 다리를 벤치위에 올리고 무서워하고(남들 보기엔 호들갑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런 내 모습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의 아들이었다. 나보다 결혼을 훨씬 빨리 한 친구의 아이는 13살. "아이고, 이모~"하며 날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말투는 친숙했지만 목소리는 변성기중이라 낯선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명시기모가 생각났다.


 명시기모와 나 사이에 딱히 공통점은 없지만 만난다면 늘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그렇지만 낯설지 않은, 그런 느낌이 명시기모와 친구 아들 사이에 있었던걸까.


엄마에게 명시기모가 있다면 우리 애들에게도 그런이모가 있답니다. 레고이모라고 해둘께요^^


 친구와 나의 속사포랩은 마쳤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정이 있다고 해서 친구와 친구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는 자리를 떠야했다. 옆에 두었던 엄마의 가방과 가디건을 챙겨 차로 먼저 걸어가는 친구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저 청소년에게 돈을 줘야겠다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나도 모르게 예상했던걸까. 웬일로 지갑에 현금이 두둑했다. 낮에 당근으로 애들 전집을 팔고 받은 돈. 10만원을 꺼내 친구아들에게 쥐어주었다. "엄마한테 뻇기지 마"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는 웃으며 좋아했고, 친구는 조수석에 탄 상태라 나와 몸싸움 할 수 없었다. "야, 뭐야!"라고 했지만 나 이 정도 돈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느낌적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하하.

 

 받을 수 밖에 없을 때를 지나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는 때를 거쳐 이제 줄 수 있는 형편의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단계였다면 각각의 단계를 너무 짧거나 길지도 않게 적당하게 즈려밟으며 거쳐온 것 같다. 나 출세했나, 나 성공했나, 나 좀 괜찮은가봐 하는 생각에 무언가 모를 뿌듯함과 내 자신에 대한 자뽕이 벅차올랐다.


 올림픽은 국뽕, 지자랑은 자뽕.


 명시기모도 이런 자뽕이었을까.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하다는 표현도 이모가 좋다는 표현도 하지 못했던 나였는데 친구아들놈은 차 창문을 열어 "이모 대박! 짱멋짐!! 고마워여어~"하며 오만원짜리 두개를 흔드는 세리모니까지 해주어 내 자뽕이 더 차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날들이 있다. 

 사는 동안 좋았던 날들을 기억하고 좋을 날들을 기대하며 오늘의 고달픔을 외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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