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현실인가 이것이 나의 현실인가 정말 나의 현실이라면 이 행복은 또 무엇을 담보로 한 행복인가. 매일매일 리즈를 경신하며 나에게 오는 행복감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인가. 진짜라고? 싶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판타지같은 휴식이
나의 현실이 맞나 싶은 생각.
속고만 살지 않았다. '행복은 찰나'라고 생각해왔는데 찰나가 이유를 모를 채 길어지면 불안할 수도 있는거지. 그 와중에 충만히 누렸다. 매일 16시1분이 되면 깨지는 행복이기에.
(아이들이 학원에서 하원셔틀을 타고 16시 1분경 숙소에 도착한다)
이런 호사는 15시50분경부터 철수준비를..
세부는 그야말로 휴식. 자연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휴식과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
하늘이 어떤 색을 띄느냐에 따라 사진의 빛도 달라지고 우리의 기분도 달라졌다. 자연에 가닿을수록 우리가 배우고 체험하는 것은 순응하는 것, 말하자면 지는 것이었다.
비가오고 날이 흐리면 수영을 할 수 없고 나가서 놀 수 없고 쨍한 사진을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아쉬움도 실망감도 주었지만
결국 자연의 지배안에 있을 때 제일 안전하다는 것도 배웠다.
자연이 허락해야 호핑도 할 수 있죠, 요트위에서 삼겹살을 먹으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어요^^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제일 놀랐던 것은 강추위
사계절이 있는 건 우리에게 축복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가뜩이나 짧아진 봄가을을 놓칠 수 없어 급히급히 여행이나 나들이를 떠나고 따사롭다 했는데 갑자기 더워지면
"아오 더워!!" 하며 급히 옷정리를 하고 시원하다 했는데 갑자기 추워지면
"아오 추워!!" 하며 급히 뾱뾱이를 붙인다. 김장을 하거나 또 옷정리를 하겠지.
이 나라에 살면서는 뭘 느긋하게 하지를 못한다(그랬던 것 같다). 계절의 변화는 늘 갑자기 오고 변하는 계절에 대한 적응도 늘 갑작스럽다. 준비된 계절의 변화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빠르고 급하고 분주하다.
세부에서는 날이 흐리거나 맑거나, 흐리거나 덥거나, 덜덥거나 더 덥거나. 계절이 급하게 오고가지 않는다.
이 상황이, 이 상태가 급변하지 않을거라는
내 짧은 짐작이라도 내 마음에 깊은 안정감을 주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감히 처음으로 "오래 살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오래 살고싶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싶다.
아직 내 눈에 담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 너무 많고, 이 나이에도 해보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고.
사는 동안 다 보고 다 해보겠어! 까지는 아니지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부디 건강하게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야겠다. 오래 살아야겠다. 끝까지 살아서 내 생을 괴롭힌 것은 찰나였고 내 생을 응원해준 것이 태반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살수록 사는게 별로야. 내 인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어느 지역의 어느 정도 크기의 집에 살지, 어떤 수준의 차를 몰지,
어느 수준의 문화를 누리며 내 인생을 즐길지 혹은 혹사할 지.
이 수준의 인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거라는, 현실에 대한 직면인지 내 자신에 대한 저주인지, 자기객관화인지를 하며 살았던 내 인생의 일부에 대해.
틀렸어. 그때의 내 생각은 틀렸어.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인생은 혼자 열심히 살아야하는 건 줄 알았지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고 출신대학이 훌륭하지도 않으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돈은 잘 버는 사람들 많던데 나는 돈을 잘 버는 직종도 아니었다.
이것이 내 팔자, 내 업보 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번에 느꼈다
나는 성공했다
라고.
여행에 같이 갔던 친구들 덕분이다.
역할을 따로 분담하지 않았었는데 자신의 능력대로 소견대로 눈치대로 역할을 해가며 스무드하게 집안이 잘 굴러갔다. 누가 밥차리면 누가 설거지하고 누구는 청소하고 정리하고.
우리끼리 잘 맞는 것 만큼이나
애들끼리도 잘 어울려서
싸우는게 일반이긴 한데 그 끝이 길지 않고 따로 또 같이 평화롭게 지냈다.
"세 분이 한 집에 사신다고요? 같이 들어오셔도 따로 돌아가시던데!"
이런 말 들을 법 하지.
우리 한 20년 됐고 여러 교회친구들 중에서는 그래도 조금은 더 친한 친구로 지냈던 것 같고 결혼하고 비슷한 시절에 애 낳아서 더 친해졌다.
여행중 차오르는 벅찬 감격(애들 없을 때) 너무 좋다, 이게 현실인가, 놀랍다, 생각할 때마다 이 친구들이 내가 편한만큼 참고 있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건가 싶어 니네 참고있냐고 물어봤는데
안참는데 안불편하데 분명히 안 참고 있는거라고 했다! 잘 맞는거라고 했다!
좋다고 말했을 때 정말 좋다 고 대답하고 이건 별로, 라고 말했을 때 사실은 나도.. 인 경우가 많았다.
쓸데없는 수다와 웃음이 쌓일수록 여행과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더 높아졌다.
친구끼리 여행가면 싸우고 유럽가면 특히 싸운댔는데 다 그런건 아닌 것!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일수도 있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게 그냥 합이 잘 맞아서 적당하게 알아서 잘 굴러가는 집단도 있다, 있더라.
순간순간 아, 성공했다. 이런 친구들이 있으면 성공한거야. 이번 생은 충분해. 라고 느끼며 여행을 충만하게 즐겼다. 고맙다 칭구 둘
계절이 정반대인 고국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방학은 한달이 넘게 남았고
나는 아직 판타지속에 갖혀있는지 여기가 어디고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겠다.
사계절의 축복이 있는 나라이니 아이들과 눈썰매도 타러가고 싶다. 그러려면 아이들 부츠를 사줘야 한다. 돈이 든다. 사는데는 돈이 든다. 여행에도 돈이 들고.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24시간 공격을 받는 지금은 그렇게 행복하진 않지만 적당히 버틸 수 있는 불행이다. 적당한 불행은 지난 행복을 퇴색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버티다보면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이 오겠지, 기대할 것이다.
열심히 살든 버티며 살든 일단 살아계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후에, 이후에 펼쳐질 생의 시간은 상상하는 그 이상일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누구나 불꺼진 터널을, 출구가 안보이는 터널을 지나는 시기가 있다. 당신에게만 유독 길고 어둡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계세요 살아있습시다 이만하면 충분해, 했는데 그 이상이 있고 그 이상이 있고 그 이상이 또 있더라고요. 위로도 되지 않는 잘난 척 같은 말만 계속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