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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May 04. 2023

남편이 500만원을 줬다, 샤넬사라고.

10년이면 오래 살아줬지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다. 우여곡절을 극복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뚫고 버텨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2022년을 여는 마음은 비장했다. 만 10주년을 기념하며 무사히 돌파할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여행을 가자고 하기엔 2022년은 아직 팬데믹상황이었다. 아이들도 다 초등학생이라 아무래도 단둘의 여행은 불가할 것을 예상하여 7주년때 함께 파리에 다녀왔었다. 즐거웠고, 버티고 살 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여행하면서 생각보다 남편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웬만하면 인내하고 감싸주며 살자고 다짐했었다. 그 당시의 감정은 충분히 그랬다.


 살면서 결심도 마음도 망가진 적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맞추고 견디며 살던 와중에 10년을 맞은 것이다. 연애가 길지 않았기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그냥 10년이다. 사랑에 빠졌었다, 그때는.


 구정연휴 마지막 날, 아이들이 일찍 잠들었던 날.

 남편과 이런저런 스몰토크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올해 10주년인데 어쩔거야?"

 "뭘 어째?"

 "결혼 10주년이잖아."

 "저번에 구찌사줬잖아."

 "읭? 그건 생일선물이고!"

 "생일이랑 결혼기념일이랑 다른건가?"

 "그럼 같은건가?"

 "여행은 못가잖아.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난 먹는 거엔 별 관심 없는데."

 "그럼?"

 "내가 돼지-젖소-돼지-젖소로 살다가 힘들게 인간이 되는 과정을 겪었잖아? 나한테 감사의 표시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아?"

 ".....들지.."

 "든다면?"

 "샤넬이 얼만데?"


(옛날에 남편이 구찌사줬던 얘기)

 


오홋? 제법!

만날 샤넬타령한 보람이 있군. 근데 내가 샤넬타령을 하는 동안 남편은 벤츠타령을 했는데... 아무래도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 건 벤츠보단 샤넬이지.


 "100만원만 주면 알아서 해볼게."

 

 남편은 혼자 안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더니 궁시렁궁시렁 100만원을 들고 나왔다.


 "어? 진짜?"

 "응, 그동안 고마웠어. 앞으로도 수고해줘."


 남편은 진심이었고 무릎을 꿇은 것 까진 아니지만 봉투에 담아 나에게 돈을 주었다.


 와, 이렇게 쉽게 된다고?

 물론 100만원으로 살 수 있는 샤넬제품은 화장품이나 악세사리, 카드지갑 정도일 것이다. 내가 모아둔 돈과 이제는 잘 쓰지 않는, 결혼할 때 샀던 가방을 팔아서 어떻게 현금화를 해볼까 생각중이었다. 그럼 지갑이라도 살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샤넬을 살 수 있든없든 나의 말을 흘리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을 해준 남편의 마음에 더 감동했다(그렇다고 샤넬을 안 살건 아니다). 오, 10년이라는 시간의 힘은 대단한 것이군. 진짜 고마워, 앞으로도 잘 할게 라고 마음으로도 입밖으로도 말하며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날은 이벤트가 있어야 하나 싶지만 바닥에서 못자는 나는 침대가 있는 안방에서, 침대에서 못자는 남편은 아이들과 아이들 방에서 잔다.


 굿나잇 인사를 하고 한 30분쯤 뒤, 자냐고 묻길래 안잔다고 했더니

 "100만원으로 살 수 있는 가방이 없는데?"

 읭? 그 사이에 검색을 해보았나보다.

 "응, 없어."

 "그럼 어떻게 사?"

 "결혼할 때 샀던 거 팔고, 그냥 이런저런 돈 보태고, 정 안되면 중고로 사던지 하려고."

 "그래도 10주년 선물을 왜 중고로 사? 새걸 사야지."

 "새 거가 얼만지 알아?"

 "알지, 봤어."

 하더니 폰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더니

 "입금했어."


 읭?

 이 오빠 왜이러지?

 이 오빠 돈 많은 오빤가?

 이 오빠 돈 잘 버는 오빠였나?


 남편은 400만원을 내 계좌로 입금했다.

 오-

 제법인데?


"이게 웬일이야?"

"너 만날 나한테 체력도 재력도 안된다고 그랬지? 잘 봐, 나 다 되는 오빠야."

"오- 체력도 된다고?"

(흠칫)

"오늘은 안됩니다."

"그럼 그렇지.."

"재력이 되잖아."

"오, 재력가오빠!"


 남편과 사는 10년 중 재밌어서, 감동적이어서, 아니면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기억하는 날이 몇 날 있는데 이날은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는 날이다.


 우리의 결혼은 9월이었지만 결혼기념 선물은 2월에 받았고, 이제 남은 1년을 두고 어떻게 샤넬백을 구할 것인지를 고민해보면 되겠다.


 남편이 현찰로 선빵을 날려준 덕에 사는 동안 중간중간 위기가 있을 때마다 아름답게 샤넬 가방을 매고 다닐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웬만하면 격앙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최대한 교양있고 격있는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당연하게도 잘 되지 않은 날이 많았다.


 인생은 그런 가보다. 잘 하려고 애쓸 때 빌런들이 나타나고 마음을 훼파시켜놓는다. 뻔히 빌런인 걸 알면서도 격앙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질 못하고, '다 집어쳐!'라며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소리지른다.

 

 그래도 '나는 샤넬을 살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은 킵해놓은 보물처럼 보험처럼 마음의 안정이랄까, 안심이랄까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10년 전에 결혼해서(지금 시점에선 11년) 1억짜리 원룸같은 아파트 전셋집에 대출끼고 들어가, 맞벌이인 우리의 급여를 합쳐도 400만원 수준의 돈을 이리 아끼고 저리 굴리며 양가 부모님을 조금씩이나마 도와드리며 대출 갚고 차도 사고 집도 사서 지금에 이른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살아온 길이었는데, 글로 쓴다면 정말 영화같구나. 대체적으로 평범했지만 중간중간 특별했던 날들이 모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남편과 위의 대화를 했던 작년 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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