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정 Aug 25. 2023

오늘의 여행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내일은 내일의 고난이 있을 뿐

작년 말에 나는 3년 넘게 곗돈을 부은 친구들과 그의 아이들과 세부한달살기를 다녀왔다. 엄마 셋 아이넷 총 일곱명의 인원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3주~4주정도의 시간을 세부에서 함께 보냈다.

 

각자에게는 퇴사, 육아휴직, 목숨을 건 2주넘는 휴가승인이라는 이슈가 있었고 겨울방학 앞뒤로 일주일씩 결석시키는 나름의 모험도 감행했던 여행이었다.


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아웃도어형인 친구들은 코로나로 꾹꾹 참아온 에너지들이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하얀 천과 바람이 있다면 어디든"은 개뿔

"돈이 있다면 시간은 알아서 생겨"라는 생각으로 여행을 추진했다. 선봉장엔 내가 있었다.



쉽게 결정한 건 아니었다. 동남아 나름이겠지만 동남아라고 그렇게 저렴하지도 않네, 모인 돈이 좀 애매한데 1년 더 모으로 유럽으로 갈까.. 여러모로 고민하다가 퇴사할 결심, 육아휴직, 긴 휴가 쟁취가 한 시즌에 겹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으므로 그냥 고!!




공동육아를 하며 우리도 몸과 마음을 편히 갖고, 우리끼리의 즐거운 시간도 보낼 겸 아이들은 어학원에 보내고 우리만의 낮 시간을 확실하게 추구하며 호핑투어를 가고 네일샵도 가고 쇼핑과 마사지도 하면서 극단적으로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 가령 책읽기, 사색, 일기쓰기 등의 쓰기활동, 운동,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에 해당되는 것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못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담고 있는 직장에서 줌미팅이 잡히면 현지와 시간이 맞을 시 줌화면에 얼굴을 내밀어주는 센스정도가 최선이었다고 하겠다.


한 달 가까이 쌓여있는 시간동안 서로 인생의 청사진이랄지 가야할 방향, 꿈이나 비전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고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좋은 날씨와 맛있는 음식과 파워넘치는 마사지사를 만난 것에 감동하고 감탄하며 오후4시까지 행복의 극치에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인생은 정말 달콤하군.







그러다 아이들의 어학원셔틀이 도착하는 4시5분부터 우리 셋은 모두 다 부화뇌동 경거망동 허둥지동하면서 오후부터 밤시간을 버텼다. 매일 오는 4시 5분인데도 늘 새롭게 무서운 4시5분이다.



 이런 날들이 28일정도 모였을 때


우리에게 지난 한 달은 꿈이었다,

이제 현실로 출발하자,

미련이 많으니 여기에 두고가자,

미련찾으러 또 오게.

하면서 눈물로 짐을 싸고 현생의 터전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물갈이를 하거나 잠시 열이 오르내린 적이 있지만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정도의 중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치는 등의 상해를 입지도 않았고 돈이나 여권을 분실하는 일도 없었다. 쓸데없이 재밌고 아름다운 기억만 차곡차곡 쌓았던 4주였다.





우리 7명이 세부에서 쓸데없이 즐겁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별 일 없었나보다. 남편과의 연락은 2-3일에 한 번 정도, 애들도 아빠를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양가부모님들도 다 별고 없으셨는지 가기전이나 후나 큰 감흥이 없으셨다.


막힌 여름 날씨에 있다가 더 기막힌 겨울 날씨로 바뀌니 어떻게 적응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우왕좌왕 설날도 보내고 아이들은 다시 학원에 다니며 친구들을 만나고 채 누리지 못한 겨울날씨를 누렸다.




겨울에서 봄이 오던 날, 갑작스럽게 한달살기에 동행했던 친구의 시어른이 돌아가셨다. 아직 일흔도 안된 젊은 연세라 믿어지지가 않았다. 슬픈 소식은 갑작스러워서 더 슬픈가. 나도 가까웠던 축에 속했기 때문에 장례를 마치고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딱 그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내 아버지에게서 암이 발견되었다. 이미 전이가 된 상태였으며 신우암4기라고 하였다.


내 귀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어오는데 나는 알아듣고 있지만 그냥 알아 듣고만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 채로 남편에게 전화해 내가 들은대로 다시 말했다. 무슨 감정을 느끼는게 어울리는 까를 생각하며 엄마에게 들은 말과 남편에게 한 말을 복기했다.


아, 아빠가 암에 걸렸구나.

항암을 하셔야 하는구나. 우리 아빠 아직 젊은데.


남편외에는 누구에게도 이 소식을 말로는 전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을 내가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듣기 싫은 목소리와 듣기 싫은 내용이 내 귀에 들리는 게 너무 싫었다.

그때만해도 수술을 할 수 있는건지, 어디에 전이가 된건지, 여명은 어느 정도인지 나도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시기였기에 누군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속으로 아빠의 병명을 되뇌이며 검색을 해보고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곤 했다.






 용기를 내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던 그 때, 다른 친구도 친정엄마의 수술소식을 알렸다. 대수술은 아니지만 간단하다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수술이라 휴가를 내서 엄마를 모셔 가고 와야하는 상황.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채 두 달이 안되어 일어난 일들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세 가정이 엄마들 뿐 아니라 아이들끼리도 합이 맞아, 또 시간과 돈의 상황도 맞아 4일도 아니고 4주씩이나 한국도 아닌 해외에서 살다가 올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그 4주동안 해외에서 머물던 우리에게도 별 일이 없었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인척들에게 별 일이 없었던 것이 정말 기적이었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중단하고 들어오고 어쩌고 했겠지만 시간과 돈을 들인 만큼 아쉽기도 했을텐데, 셋이 하나같이 아쉬움없이 충분하고 충만하게 다 누리고 돌아와서 도미노처럼 슬픔에 해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겪어보니 행운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구나, 참 좋은 기회를 줬구나, 온 우주가 우리의 한달살기를 도와주었구나. 쓸데없이 즐거운 시간만을 누리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돈을 더 모으자고 1년을 미뤘다면, 이 모든 슬픔을 겪어가며 우리는 '연말에 떠나자'며 신나게 준비할 수 있었을까?


딱 작년 이 맘때 우리는 세부의 어학원들과 카톡을 주고받으며 이제 여름방학 지나는데 겨울방학 프로그램이 마감된거냐며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던 작년을 생각하자니, 친구의 남겨진 시어른과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를 내 아버지의 건강과 친구의 친정엄마는..

 

오늘 할 여행을 다음으로 미루면 돈이야 더 모을 수 있겠지만 오늘의 건강과 상황을 담보할 수 없는 것.


마음과 상황이 지금 할 수 있는 여행으로 딱 맞춰져 있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떠나시길.

다음에, 내년에, 그후에...

그때는 그때에 어울리는 다른 여행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지금 구상하고 있는 그 여행은 지금 딱 어울리는 것.



그리고 지금의 여행을 내년으로 미뤄봤자 돈 없는건 지금이나 내년이나 마찬가지













매거진의 이전글 장례식이 즐거워도 된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