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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Jul 30. 2020

오늘은 유난히, 도마 팔자 내 팔자

오늘 따라 도마에 감정이입

아침부터 설거지다. 원래 설거지는 아침부터 하는 거지. 남편은 아침을 안 먹으니 나랑 아이들이랑만 먹은 아침인데 설거지 거리는 잔칫집 수준이다. 뭐 대단한 걸 먹는 것도 아닌데 매끼 설거지가 이렇다. 싱크대를 보며 치울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오지만 일단 아이들부터 치우자. 빨리 어린이집으로 보내야 나도 편안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을 보내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대단하게 차리지도 않았는데 도마와 냄비, 반찬 그릇, 밥그릇들이 쌓여있다. 도마를 씻어 가스렌지와 벽 사이에 세로로 세워둔다. 주방이 좁아서 도마 자리는 거기가 최적이다. 냄비도 씻어 가스렌지 옆에 비스듬히 엎어두고, 국자도 그 근처 건조대에 뉘어 놓는다. 행주로 싱크대 물기를 닦고 식탁도 닦고 가스렌지 주변도 닦는다. 도마는 서 있다. 도마는 항상 서 있다.


도마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도마의 크기에 비해 조리대가 좁기도 하고 쓰고 정리하는 게 귀찮기도 해서 두부나 묵 같이 물컹한 걸 썰 땐 그냥 손바닥에 올려놓고 썰고, 파나 고추는 필요할 때마다 대충 가위로 자른다.



그러니 도마는 가끔 눕는다. 내가 김치나 고기를 썰 때, 닭볶음탕이나 갈비 같은, 나에겐 대작(大作) 같은 요리를 할 때다. 사용하는 칼도 식칼이라 도마에 가해지는 힘도 세다보니 가끔 사용하지만 사용할 땐 심하게 사용하게 된다. 그러면 이내 도마에 칼집이 난다. 김치를 썰 때면 빠알간 물이 들기도 한다. 썰어놓은 재료들을 몽땅 냄비에 넣고 끓이느라 도마가 필요 없어지면 누워있던 도마를 빨리 씻어 원래 자리에 세워놓는다. 조리대가 좁아 도마가 오래 누워있으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오늘따라 서 있는 도마가 눈에 밟힌다. 허리가 아플 것 같다. 도마는 하루 종일 서 있고, 내가 딱히 사용하지 않으면 삼 사일도 내리 서 있다. 눕는다고 쉬는 것도 아니다. 누워봤자 식재료들을 써는 잠시 동안일뿐, 그마저도 칼 맞으며 누워있고, 가끔은 빠알간 물도 들고, 그렇게 축축하게 칼을 맞고 있다가 물벼락 맞고 정신이 드나 싶으면 구석에 서있어야 한다. 기약없이.


나도 항상 서 있었다. 앉아 있을 틈이 없이 서 있었던 날들이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나와 집으로 왔을 때부터 한 동안은 자거나 밥 먹을 때가 아니면 거의 서 있었다. 부엌과 세탁실에서, 집안일은 서서하는 일 투성이다. 행여나 아이가 징징대는데 나 대신 아이를 안아줄 사람이 없을 땐 한 손에 아이를 안고 서서 밥을 먹었다. 아니, 밥을 마셨다. 가끔은 억지로 삼켰다.


아이가 잠들면 눕혀 놓고 쌓여있는 집안일을 하고 이유식을 만들다가 아이가 깨면 스트레칭도 안된 몸으로 아이를 들어올린다. 허리가 아프다. 어쩌다 가끔 내가 누워있으면 아이는 내 몸을 타고 논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내 몸을 타고 누르면서 논다. 작은 아이지만 무겁고 아프다. 힘 조절이 안 되는 아이이니 때리기도 하고 꼬집기도 한다. 슬슬 다리와 허리에 힘이 생기면 누워있는 내 위로 올라와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논다. 나날이 강도가 세진다. 숨이 턱턱 막힌다. 윽 하며 죽음 직전의 비명을 지르지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아이는 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지만 해맑은 표정으로


 “엄마 이 정도로 죽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도마도 나처럼 신음하겠지.


내가 도마 위로 무심하게 턱턱 올려놓는 물기 덜 빠진 식재료들 때문에 도마도 무겁고 아팠을까. 쉼 없이 칼이 찧는 엉덩방아에 숨이 막혔을까. 온종일 서 있있어야 하고 가끔 누울 수 있어도 쉬지 못하는 도마의 팔자가 그 때의 나의 팔자와 닮은 것 같다. 도마의 그 날씬한 옆 라인이나 내가 좀 닮았으면 좋았으련만.


오늘은 눕혀드림


오늘따라 뒤돌아 서 있는 도마가 자꾸 눈에 밟힌다. 깨끗하게 정리한 조리대에 눕혀준다. 그래도 못내 미안해 베란다로 나가 햇볕을 쪼여준다. 날씨를 탓하며 일광소독을 안 한지도 오래된 것 같고, 보통은 버리는 물건인 것처럼 베란다 바닥에 던지듯 내려놨던 것이 생각나, 오늘은 특별히 빨래 건조대 위에 편하게 눕혀 볕이 잘드는 곳에 모셔본다.


사실 도마는 가스렌지 옆에 세워놔도 잘 마른다. 특별히 일광소독을 했다고 다른 날과 다르게 광이 난다거나 죽죽 그어져 있던 칼자국이 없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오늘 같이 도마에 대한 내 마음이 특별했다고 해서 앞으로 도마를 쟁반 대신 사용하거나 칼질을 약하게 하진 못할 것이다. 도마는 항상 내가 세워 두었던 그 자리에서 내 필요에 따라 도마의 역할을 할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할 때마다 변함없이. 항상.


내가 그렇게 몇 날 며칠 세워 두다가 가끔 사용하는 도마였지만 도마 덕에 우리가족이 가끔이나마 음식다운 음식, 집밥 다운 집밥 먹으며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와중에 나를 그렇게 서 있게 만들며 편하게 눕지도 못하게 했던 아이는 이제 커서 초등학생이 되었다. 도마도 고생했고, 나도 고생했다.


앞으로도 계속될 고생이지만 도마와 나, 동반자 같다. 나의 부엌친구, 도마씨.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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