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인 아빠에게 나는 첫째로 태어난 딸이다. 으레 아들일 줄 알고 이름까지 다 지어 놓으셨다는데 예상치 못한 딸이라 이름을 새로 짓느라 애를 쓰셨다고 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나를 정말 사랑하셔서 삼칠일까지는 아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며 나를 꼭꼭 숨겨놓으셨고(엄마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서였겠지만) 삼칠일 끝나는 날, 현관에 고추를 매어놓은 새끼줄을 달아놓으셨다고 했다. 내 동생은 사내였지만 내가 받았던 특별대우는 전혀 받지 못했다.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있거나 할머니의 다리를 베고 자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아늑함'이라는 단어가 함께 떠오른다. 그렇게 아늑함을 주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암에 걸리셨고 발병 넉 달만에 돌아가셨다. 내가 10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발병 초기 병원에서 잠시 나와 우리 집에 계실 때 나는 저녁마다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 보곤 했다.
어느 날, 멍하게 벽에 기대고 앉으셔서 텔레비전을 보시던 할머니와 적당히 떨어져 앉아 있다가 할머니 옆에 누울까 싶어 할머니께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늑한 할머니, 따뜻한 할머니, 그런 할머니였으니까.
"아이고 속 답답해. 야, 활명수 좀 가져와."
라고 말씀하셨다. 나가서 사 와야 하나 싶어 일어났더니 "저기 텔레비전 위에 있잖아!"
화 까진 아니었고 짜증을 내셨다.
텔레비전 위에 있던 활명수를 갖다 드렸더니 뚜껑을 열라고 하셨고, 열어서 드렸더니 드시다가 조금 흘리셨다.
"뭐 하고 있어! 빨리 휴지 가져와!"
나는 재빨리 휴지로 입 아래를 받쳐 드렸다. 다 드시고는 내게
"갖다 버려!"
하시고 누울 채비를 하셨다.
할머니, 따뜻했던 할머니.
그 날의 차가웠던 방의 온도를 기억한다.
계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그 날의 차가움 때문인지 할머니의 소천에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었다. 차가웠던 기억이 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할머니는 사랑이다. 따뜻한 사랑.
따뜻했던 할머니의 등과, 할머니의 등에 업혀졸릴 때면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로 긁었던 할머니의 귀 근처의 머리카락. 내 이름을 부르시던 할머니 특유의 톤과 억양. 차가운 기억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크기의 사랑의 기억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를 좋아한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를 위해 아이를 봐주시는 엄마를 볼 때면 내가 아이만 할 때 내 시선에 머무르던 할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그래도 따뜻함과 아늑함이었던 할머니를.
어쩌면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깊이보다 더 깊게 기억될 아이들의 할머니. 할머니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