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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Oct 20. 2020

조기갱년기가 온 남편에게 대들 수 없어 여기에...

배려심깊은 아내로 거듭날까말까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혼이라는 "생활"앞에 사랑은 무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사실 "순간"이라기 보다는 "시기"라고 해야하나, 그냥 "무력해진다"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결혼하기 전에 얼만큼 사랑했든,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든 생활은 사랑보다 길고, 사랑의 방향이랄까 의미랄까 아무튼 사랑이라는 것이 길을 잃은 것인지 그제서야 길을 찾은 것인지 갈피를 알 수 없는 놀라운 생활의 더미가 내 앞에 펼쳐진다, 펼쳐졌다, 앞으로도 계속 펼쳐져 있겠지. 그렇더라.



남편은 괜찮은 사람이다. 감정이 조금 상한 지금도 객관적 주관적 입장에서 그래도 남편은 괜찮은 남자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부족하고 가난하게 시작한 결혼생활이었지만 형편에 상관없이 나는 남편덕분에 싱글때에 비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며 살았다. 주변에 유력한 시가를 만났거나, 자신의 친정이 유력하거나, 아니면 부부가 유력해서 유력하게 신혼을 시작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다소 힘에 부치는 생활의 부족함을 친한 친구들에게 토로할 때면


"야, 김호떡. 내가 아는 애 중에 니가 시집 제일 잘 갔어!"

"엥??"

"느네 형(남편)은 완전 김호떡한테 최적화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딨냐?"

"뭐래."

"진짜야. 니가 몰라서 그렇지. 내 주변 애들 형들 중에 느네 형이 제일 멀쩡해."

라는 말을 사실 한 두번 보다는 많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때로는 힘들게, 때로는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편이 좀 낯설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건, 한 2주 전 친구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밤이었다.

"오늘 재밌었어?"

"응, 완전. 초막골 생태공원 되게 좋더라."

"친구들도 재밌었데? 자기만 재밌었던거 아니야?"

"(왜 저래?) 다 재밌어했지!"

"아니, 자기가 좀 주장이 강하니까 친구들이 별로였어도 말 못하는거 아니야?"

"(어이상실, 뭔소리지?).......내가 주장이 강하다고 재미없는거 재미없다고 말 못할 애들이 아닌데?"

"그게 자기 생각인지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아?"


.....뭐지 이 오빠, 나랑 헤어지고 싶나? 나랑 싸우고 싶나? 정확히 이 때 부터 남편의 말과 행동이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 화를 내든 짜증을 내든 남편은 나랑 똑같이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감정기복과 상관없이 늘 보통의, 안정적인, 편안한, 바꿔말하면 화내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내게 반응해 주었었다. 하지만 그랬던 남편은 조금씩 사라져가고

"짜증내지 마"

" 화내지 마"

"한 번만 말해"

"그만해"

"아 진짜"

등의 말을 하는, 인정하긴 싫지만 나와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었다. 나와 같은 기복을 타면 파국은 코앞인데.


남편이 오히려 늘 예측가능한 반응을 했던 사람이기에 나는 마음놓고 화내고 짜증내고 지랄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이제 보통의, 안정적인, 편안한 반응을 내가 맡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남편에게 대꾸하지 않고 대들지 않고 눈치봐가면서 며칠 살았더니 너무 답답하다. 다들 괜찮은 줄 알지만 실은 그렇게 괜찮지도 않은 남편의 수준을 여기에서라도 토로해야 내 마음이 풀리겠다.




1.

나는 그냥 쇼핑몰에 간다. 남편이 그냥 외제차 영상이나 블로그를 들여다 보듯이. 쇼핑몰에 간다고 늘 뭘 사는 게 아니다. 남편이 외제차 영상본다고 외제차를 사지 않(못하)듯이.

"호정아, 쇼핑몰에 가면 예쁘고 갖고 싶은 게 많은데 자꾸 가면 사고 싶지 않아?"

"사고 싶다고 다 살 수 있나 뭐, 그냥 보기라도 하면서 좋아하는거지."

"자꾸 보면 갖고 싶잖아. 물심양면 이란 말도 있듯이."

"....물심양면? 견물생심 아니니? 물심양면으로 나한테 사주고 싶니?"

"아....."

남편은 한자능력시험2급 보유중이다. 헐.


2.

나의 좀 잘못된 소비습관, 사실 습관까지는 아니고 스타일이라고 해야할까. 일단 싸거나 할인율이 크면 사고싶어하는 편이다. 마침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필요한 것 일때도 있고. 비싼 것 하나 보다는 싼 것 몇 개를 사는 편이기는 한데 예전에 김생민씨가 "안 사면 100%할인"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난 다음에는 진짜 필요한 것 아니면 안 사긴 한다. 아무튼, 그 유행어가 있기 전에 세일폭이 큰 괜찮은 브랜드의 옷이 있어서 사려고 했더니 남편이

 "그런 거 많지 않아?"

 "없어."

 "비슷한 거 본 것 같은데?"

 "비슷해 보여도 다 달라. 똑같은 건 없어. 이거 싸잖아."

 "싸다고 막 사면 어떡해. 조금이라도 아껴야지. 소탐대실이야."

 "뭐가 또 소탐대실이야."

 "........."

 "그냥 편하게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해."

 "아......"

 "어후, 진짜."

 "(얼굴 가리고)그러니까 소탐이 대탐되는거야. 아 씨. 어머님(우리 엄마)께 내 얘기(물심양면 포함, 자기 무식한 얘기) 하지 마라."

 "고마해라. 티끌 모아 티끌이다. 이거 살 거야."

 "사, 내가 사줄게. 말하지마. 응?"

-_-


3.

남편도 문과출신인데 생각보다 문과적인 상식이 좀 드물어서(?) 당황한 적이 있다. 맞는 예술적 지식적 코드가 없는데 어떻게 결혼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자꾸 뭔가 어긋나고 뭘 모르고 해서 답답했던 적이 좀 있다. 암튼, 가족끼리 강원도 어디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입구에 금빛으로 엄청 큰 황소 동상이 멋드러지게 세워져있었다. 그걸보더니 남편이


"우와! 황순원의 소다!!"


하면서 사진찍어 주겠다며 황소동상으로 뛰어가는거다. 진짜 목놓아 웃었다. 완전 심금을 웃겼다. 주저 앉아 울었다. 울면서 웃는 날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중섭의 소! 황순원의 소나기!! 이 먼춘아!!"

"아, 그런가?"

"어우, 그냥 봐, 아는 척 하지말고."

"하하하하하하. 자기, 내가 그랬다고 친구들한테 말하지 마! 알았지?"

"창피한 건 알아?"

"알지."

기가 막혔다. 진짜.


친구들한테는 말 안했다. 물론 내 엄마에게도. 구독자님들과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이 곳에 들어오신 분들께 말한거지. 아우 속 시원해. 말로 했으면 더 좋을텐데. 내일 아침 모두가 다 출근하고 등교하고 등원하고 나면 독백이라도 해야겠다. 내 남편의 무식에 대해.

내가 발견한 남편의 단 하나의 단점에 대해.


그래도 그것보다는, 아침이 되면 답답해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아예 새 사람이 되어 아침을 맞이하면 좋겠다. 내가 아니라 남편이.




저..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금 이 글이 어디에 노출되고 있나요? 어디서 보고 들어오신건가요? 다음메인도 아니고 카카오탭도 아닌데 조회수가 높아서 신기해가지구...^^ 알려주시면 저의 답답함이 좀 풀어질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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