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다르다는 건 이제 너무 당연해서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직 불편하다. 마치 어제까지 잘 있던 집 앞 단골 카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임대 문구가 붙어있는 상황만큼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얼마 전, 한 학부모님께서 한숨 섞인 상담을 요청하셨다. "요즘 OO이가 핸드폰을 놓질 않아요. 결국 어제는 크게 싸우기까지 했어요. 선생님도 느끼시죠?" 실제로 그 학생은 최근 들어 핸드폰에 집착에 가까운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숙제는 해오지만 단어 시험 성적은 떨어졌고, 수업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나 역시 아이를 앉혀두고 '걱정'이라는 이름의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별일 없는 날들이 지났다. 다시 밝아진 아이의 표정을 보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을 때쯤, 아이가 불쑥 말을 건넸다. “선생님, 저 이제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여느 아이들처럼 연예인이나 유튜버가 되겠다는 아직은 형체가 없는 꿈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아이는 인스타그램으로 후드티 협찬을 받았으며, 앞으로 이 계정을 키워 수익을 내보려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았다. 내 눈엔 그저 '집중력을 뺏는 존재'였던 작은 화면이, 아이에겐 이미 '새로운 기회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덧붙였지만, 아이의 거침없는 시선 앞에서 내 머릿속의 상식들은 갈 곳을 잃고 헤맸다. 내 안에서는 “그래도 내 경험에는 공부에 발을 걸쳐두는 게-”라는 방어 기제와 “내 경험은 이제 시대 뒤편으로 밀려난 유물일지도 몰라”라는 의구심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중학생 아이에게 어른다운 가이드라인을 주고 싶었지만 주저하게 되었다. 내가 쥐여준 그 가이드라인이 사실은 개발되기 전의 흔적만 가득한 ‘낡아빠진 지도’라면, 그것은 조언이 아니라 방해물일 뿐이니까.
사실 이건 내가 어릴 적 어른들의 조언에 가졌던 의문을 또다시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속상한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익숙함에 눈을 감지 않고, 아이들이 보고 있는 더 넓은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대적 아날로그가 되어가는 서글픔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불편하지만,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이 건강한 의심을 기꺼이 곁에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