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잘 타고난 것일까. 두 세기에 걸쳐 사는 중이다. 20세기 때는 21세기를 얘기할 때 상상 속의 세계를 이야기하듯 했었다. 길도 집도 하늘에 떠 있고, 도시는 우주정거장을 연상하게 하는 초현실주의 상상화였다. 어떤 방면에서 보면 세상은 상상만큼 빨리 변화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또 다른 방면으로는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생각도 든다. 21세기에 접어든 지 기껏해야 24년 지났고 앞으로 75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지난 3, 40년 동안의 어마한 변화를 되짚어보면 앞으로의 변화는 예측이 불가하다.
100년을 세기라는 명칭을 따로 붙여 부르게 된 이유는 적절한 단위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급변하는 지금은 100년 단위로 끊어 그 시대의 사조를 얘기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20세기를 살던 어린 시절 우리는 미래를 단언하는 무수히 많은 말들에 반신반의하며 두려움과 기대를 했었다. 그때의 예언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세끼 밥 대신 한 알의 캡슐로 모든 영양소를 섭취하게 될 것이라 했다.
어긋한 예언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상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었다. 씹는 동작이 뇌 운동과 연관되어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되는 행위라는 것을 몰랐었다. 중대한 일을 간과한 채 과학의 발달과 편리함이라는 함정에 빠져 캡슐 한 알로 살게 될 것이라 믿었었다.
그런 상상이 무색하게 세상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TV 프로그램은 온통 먹방과 관련된 프로그램으로 난무한다. 먹방을 가장한 요리와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여주는가 싶다가 요즘은 대놓고 먹방인 프로그램도 여럿 있다. 먹방러들의 입속은 마치 동굴 같다. 입구는 좁지만, 입안의 공간은 예측불허이다. 한입에 들어가는 양으로, 보는 이들을 한 번 놀라게 하고, 먹는 양으로 두 번 놀라게 한다. 씹지 않고 삼키는 수준이다. 내부 소화기가 부담해야 할 일은 보는 이의 걱정이 된다. 더욱 맛있는 척, 더 잘 먹는 척, 누가 더 많이 먹을 수 있냐를 두고 경쟁하는 연출이 인기의 비결이다. 안쓰럽다. 이렇게 자신을 학대하고 난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과연 후회는 없을까 궁금해진다.
먹는 행위는 ‘먹는 즐거움’이라는 말을 넘어섰다. 자본이 침투하여 사람을 학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캡슐 한 알의 기술개발은 그래서도 안 되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더욱 만무하다.
미국 윈코푸드 야채 진열장에서 중간 크기의 나파 캐비지가 두 포기밖에 없었다. 더 없냐고 진열 담당 직원에게 물었더니 곧 창고에서 두 박스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나더러 김치 만들려고 하냐며 물어왔다. 어떻게 김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먹방 TV에서 봐서 안다고 했다. 계산대 직원도 똑같이 물어왔다. 많은 캐비지를 사는 동양인 아줌마의 동향이 신기하던 찰나 먹방에서 봤던 경험으로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먹방은 국경을 넘어 인기 있는 오락이 되었다. 먹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이젠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먹방’은 고유명사가 되어 Mukbang으로 표기되고 다른 나라 네티즌들도 한국어로 발음한다.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것만큼 추잡스러운 게 없다’는 우리의 옛말과는 대조적이다. 없어서 못 먹는 시기에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먹는 구경이 하나의 취미가 되었고, 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는 세상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다.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10명 중 1명꼴로 존재한다지만 딴 세상 이야기로만 들린다. 현란함과 기이함과 대리만족이라는 복잡다단한 이유로 인기를 끌고 있는 먹방은 언제쯤 지겨움을 낳을까. 어서 이 유행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