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이 들썩들썩 역사 답사’라는 타이틀로 보성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기업의 노동자 연대 본부에서 지원해 주는 사업으로 여러 해 진행되었다는데 나는 올해 처음 참가했다. 같이 활동하는 도서관의 한 멤버가 해마다 이 역사 기행을 기획하다시피 일을 맡아서 해왔다고 한다.
역사 기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도서관에서 위탁받고 있는 ‘교육 후견인’사업과 연계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교육 후견인제는 다방면으로 돌봄이 필요한 유치원·초·중·고 학생을 교육청에서 선정하여 지역사회와 협업하여 멘토링하는 사업이다.
우리 도서관에서 맡은 아이가 모두 7명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야외로 나가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이동인데 이동을 위해서는 차량이 문제이고 경비 문제가 수순으로 따른다. 주말 이틀을 모조리 할애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멘토들의 사정이 여의찮은 문제도 있었다. 또한 식사비와 숙소비, 교통비 정도로 지원되는 돈으로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여력이 없었다.
막연히 생각만 하던 찰나 역사 기행과 퍼즐 맞추기 하듯 안성맞춤 여행이 꾸려졌다. 초등 4학년부터 90세 어르신까지 나이를 불문한 38명의 멤버가 구성되었다. 40인승 버스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인원이 몸을 싣고 머나먼 남도로 출발했다.
벌교 보성은 태백산맥의 주요 배경이 된 지역이며 4·3 민주항쟁과 같은 뼈아픈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다. 숙소는 보성에 위치한 ‘거북정’으로 불리는 봉강 정해룡 고택이었다. 봉강 정해룡과 그의 후손들은 모진 현대사의 질곡에 8명이 죽고, 37명이 옥고를 치르는 집단 수난을 겪으면서도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는 가훈을 실천하였다. 마침, 봉강의 자손 중의 한 분이 역사 기행에 함께 참가하게 되면서 역사 답사는 신기하리만큼 아귀가 들어맞는 완벽 프로젝트가 되었다. 400년 된 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 정길상씨의 지극한 효심으로 고택이 잘 보존되고 있었으며, 얼마 전 출판된 따끈따끈한 정해룡 평전까지 답사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고택은 역사가 안고 있는 우직함이 배어있었다. 무엇보다 뒷산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의 물이 집안을 관통해서 마을로 내려가는데 그 물줄기가 내는 소리는 강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툇마루에 앉아서도 계곡의 물소리를 만끽할 수 있는 운치는 손꼽히는 풍수지리를 품은 곳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숙소는 누구든 신청 이용 가능하다니 보성을 방문하는 분이라면 적극적으로 권해드리고 싶다.
태백산맥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는 우연히 조정래 작가를 직접 보는 영광을 가졌고, 아이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으로 갯벌 체험을 했다. 갯벌 체험은 진득진득 진흙만큼이나 가슴 깊은 감동을 남긴 시간이었다. 푹푹 빠지는 진흙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아이들은 빠르게 도망가는 꽃게를 잡느라 안간힘을 썼다. 빠지는 친구를 끌어주고 미끄러지는 친구의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 민철이는 밤새 게임을 하느라 제때 등교를 못 할 때가 많았다. 갯벌 체험을 하는 날 밤, 북토크를 마치고 아이들 방에 가봤더니 민철이는 일찌감치 대자로 뻗어 자는 게 아닌가. 아니 저 애가 “밤새 게임 하느라 잠 못 자는 애 맞아?”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웃음이 나면서도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휴대폰이나 게임이 없어도 친구들과 실컷 놀 수 있는 환경을 못 만들어 주는 현실,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는 상황들이 모두 어른들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결과이다. 아이에게 베개를 바로 베어주고 땀으로 젖어있는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잘 자라다오’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보성은 백남기 농민의 농터이기도 했다. 고인을 대신해서 그의 아내가 농사를 맡고 있었고, 당시 집회에 함께 참석했던 후배 농민 한 분이 모충사와 밀밭을 소개하며 가이드를 자처해 주셨다. 보성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품위가 있었다. 정씨 고택을 지키고 계신 아드님 정길상님은 평범한 시골 노인이 아니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한 분, 그래서 한 권의 역사서와 같은 분이었다. 백남기 농민의 후배도 평범한 농사꾼이 아니었다. 농민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실천하는 분이었다. 역사가 준 핍박과 상처가 사람들을 그렇게 의식 있고 도도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이번 기행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의 소감을 한마디씩 들었다. 아이들에게 먼저 마이크를 쥐여 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갯벌 체험을 최고로 꼽았으며 불편할 줄만 알았던 고택에서의 하룻밤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이 의미가 깊었던 점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역사를 바로 세우려 애쓴 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체험했다는 점이 그 첫 번째이다. 책으로 배우는 역사보다 몇만 배 더 깊이 있게 소통한 느낌이었다. 두 번째로는 초등 4학년부터 90세 어르신까지 세대 대통합의 장이었던 점이다. 초등학생들은 모든 어른의 애정과 대견하다는 눈빛을 넘치도록 받았다. ‘대한민국의 희망 000’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친구의 말에 버스 안 모두가 한바탕 웃었고 그 말이 어찌 그리 감사하던지. 90세 어르신은 민주항쟁에 앞장섰던 분으로서 아드님의 보좌를 받으며 참가하셨다. 어르신은 올해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으로 참가했다며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가는 곳마다 빠지지 않고 하차하여 관람하시고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는 어르신의 열정과 정정한 자세에 탄복했다.
여행은 가는 곳과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매번 다른 감동을 선사 받지만, 이번만큼 오래 기억될 여행은 드물듯 하다. 여러모로 사람에 의해 가슴 뭉클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