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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Dec 10. 2024

집회장을 수놓은 새로운 풍경


12월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분주한 달이다. 한 해의 마지막을 결산하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각종 모임과 송년회가 잡혀있을 것이다. 나 역시 다른 달에는 없던 모임들이 줄줄이 잡혀있던 터였다. 취소하거나 미루면서 적절히 가지치기해야만 했다.     


지난 토요일은 몇 달 전에 잡아둔 초등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멀리서 오는 친구도 있고 해서 취소할 수 없었다. 그날은 윤석열 탄핵안 표결이 오후 5시에 있었다. 우리 집에서 모여 같이 점심을 먹고 집회 나갈지에 대해 의논해 보자며 일단 모임을 가졌다. 새벽밥 막고 나선 대구 친구, 경기도 이천, 진접, 구리, 의정부 등 모두 멀리에서 온 친구들이 피곤할까 봐 강요할 수는 없었다. TV로 표결 과정을 지켜보다 중간에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국힘당 의원들이 늦게라도 뉘우치고 투표를 위해 나타나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하며 국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지하철 역사 내 인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출구로 밀려 나가는 사람들, 개찰구로 들어가기 위한 줄,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줄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었다.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몸을 녹이는 사람들 그런 광경을 보자 마음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올라왔다. 몇몇 권력자들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날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토요일 집회는 2시부터 시작했다는데 거의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일요일도 어김없이 집회장에 나갔다. 내복을 단단히 껴입고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옆사람들과 나눠 먹으려고 호두과자와 귤을 챙겼다. 장시간 앉아 있으면 춥고 배고프지만 밥을 먹겠다고 집회장을 이탈하는 일은 거의 없다. 집회장 사람들은 알아서 각자 가져온 간식으로 식사를 때우고 주위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하는 것 같았다.     


토요일과 다름없이 일요일도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었다. 시민 발언 시간에는 중학생뿐 아니라 다음 주 시험을 앞둔 고등학생, 그리고 수능을 치른 학생, 대학 생활 것 없이 피 끓는 청춘들의 분노가 여과 없이 분출되었다. 그들의 발언은 참신함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 퍼져 나갔다. 집회장은 활기가 넘치고 신명 났다.    


아마 스무 살 남짓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발언이 솔직 깜찍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는 12월3일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 참석했는데 토요일 집회에만 빠졌다고 했다. 이유는 ‘김장’ 때문이었다. 지난 대선 이후 그는 가족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고 했다. 특히 언니, 오빠는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달라 자신을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을 계기로 자신은 가족들에게 고개를 들고 큰소리칠 것이며, 그들의 잘못을 꾸짖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집회장 오신 여러분들의 가족 중에도 그런 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같이 그들을 끌고 집회장으로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청년의 발언은 호소력이 있었다. 부모님 세대는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자신들은 태어나 보니 이미 선진국이 되어있더라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 국가였고 자라면서 풍족한 선진국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부디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지 말아 달라며 부탁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집회장은 웃음을 줬다가 때론 가슴 뭉클한 눈물을 선사하는 등의 옴니버스식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발언뿐 아니라 MZ세대들이 장악한 집회장 또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얼마 전 느닷없는 눈이 서울의 풍경을 바꿔 놓더니, 지금은 콘서트 응원봉이 형형색색 밤하늘 풍경을 누비고 있었다. 청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응원봉을 들고 나오는가 하면 갖가지 방법으로 반짝이는 물건들을 만들어 나왔다. 집회장에서 이렇게 많은 종류의 응원봉을 구경하게 될 줄이야. 거기다 집회장의 또 다른 이색 볼거리는 K-POP 떼창이다. 청년들은 입을 모아 함께 노래를 외치며 탄핵을 외쳐댔다. 집회장에서 로제의 ‘아파트’는 가장 핫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앙하는 스타와 연계를 지어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참여하고 있었다.      


젊은 친구들은 엉덩이 깔개도 없이 차가운 맨바닥에 주저앉아 집회를 이어갔다. 서로서로 배려하며 깔개를 빌려주고, 떠날 때는 뭔가를 보답하고 서로를 챙기는 데도 여념이 없었다. 근처 건물 안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일부를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집회 참석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 주위 가게들에서 선결제 해두어 누구라도 주문할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다소 경직되고 무거울 것 같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경쾌하고 다채로운 풍경들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참여가 더없이 고마웠고 한없이 든든했다. 그들의 외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오마이 뉴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s://omn.kr/2bd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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