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이라는 단어가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글자 생김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한자 雨傘은 글자에서 이미 빗발치는 비가 연상이 될 정도로 비의 낭만을 품고 있다. 雨자에는 창밖으로 내리는 비가 보이고, 傘자에는 삿갓모양 아래로 우산살대가 얼기설기 엮어있는 모습이 실제 우산의 형상이랑 똑같이 생겼다. 영어의 Umvrella는 또 얼마나 낭만적인 발음이 나는지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아마 우산이 낭만적일 수밖에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데 한 몫 한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내용이나 장면들은 생각나질 않지만 꽤나 유명했던 작품으로 아직도 뇌리에 새겨져 있을 정도면 우산과 쉘부르라는 항구도시가 잘 어울려 인상 깊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우산은 언제나 풋풋한 남녀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등장하는데 이를 능가하는 대체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로맨틱영화의 대명사 <클래식>에서 조인성(상민)은 몰래 사랑하는 후배 손혜진(지혜)을 위해 비오는 날, 가지고 있던 우산을 학생회관 점원 누나에게 양보 한다. 나무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지혜에게 달려간 상민은 버리고 온 우산대신 그의 외투를 머리위로 올려 지혜를 그 아래로 들어오게 한다. 며칠 후 또 비가 내리는 날 지혜는 상민의 우산이 매점 누나에게 맡겨진 이유를 알게 되었고 외투를 머리위에 쓰고 도서관까지 데려다준 그날의 일이 상민의 의도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는 지혜가 자신의 우산을 점원에게 양보하고 지혜는 상민의 우산을 들고 비를 맞으며 세상을 다 가진 몸짓으로 상민을 찾아간다. 상민과 지혜가 외투를 우산으로 상징화 한 채 빗속을 뛰어가는 장면은 로맨틱의 시그니처가 될 만큼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의 배경음악은 신선하고 군더더기 없는 음색으로 첫사랑의 풋풋함을 묘사해 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 주었다. 이 영화에서 우산은 두 사람의 썸이 본격적인 사귀기 타이밍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그 시간적 갭을 메꿔 주었다.
또 다른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병헌의 우산 속으로 낯선 여인 이은주가 훅 들어온다. 버스 정류장까지만 씌워 달라는 요청에 이병헌은 자신의 한쪽 어깨가 흠뻑 젖도록 기꺼이 우산을 내어준다.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는 순수한 청년은 그녀의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채 그냥 보내고 만다. 자신의 우산 속으로 들어온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는 매일 우산을 들고 우연이라도 마주치기를 기대하며 거리를 배회한다. 운명의 첫사랑을 눈앞에서 놓치고 그녀를 잊지 못한 채 입대를 결심하게 되고 그렇게 세월은 흐른다.
이렇듯 우산은 유독 첫만남, 첫사랑에 자주 등장하는 매개물이다. 우산은 썼을 때의 아늑함, 외부에 훤히 드러나 있지만 동시에 단절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 아늑함이 주는 작은 공간을 같이 공존한다는 물리적 거리는 그 속에 있는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까지 매우 가깝게 해준다. 기차에서나 장거리 버스 안에서 우연히 나란히 앉은 남녀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확률이 높은 이유와 비슷하다. 거리가 주는 친밀감은 특정한 장소가 아닌 길거리에서도 얼마든지 우산이 만들어 주는 공간에서 둘만의 공간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들에게 우산은 비를 피하는 도구가 아닌 낯설거나 친하지 않은 두 사람이 같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단박에 창출해 내기에 더없이 좋은 자재가 되어준다.
언어가 시대의 맥락을 품고 있는 것처럼 물건도 시대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요즘에는 우산에게 그런 낭만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훅 내 우산 속으로 들어온다면 먼저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 다음은 신고할 태세를 취할지도 모른다.
한번은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는 날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비를 맞고 지나가길래 씌워주겠다며 다가갔다. 비가 너무 거세게 오는 터라 그 아이도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가는 내내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한번은 또 어떤 할머니를 씌워 드린 적이 있는데 역시 연륜이 갖는 여유랄까 연신 고마워하시며 기꺼이 우산공유를 허락하셨다. 이처럼 우산을 공유한다는 것은 나이, 성별의 다름이 상대에게 아무런 의심이 없는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지 만약 우연의 만남을 기대하고서 하는 행동이라면 매몰찬 보복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이전의 우산을 대변할 만한 썸의 매개물이 있을까? 우리세대에게 우산은 그렇게 때로 낭만을 선사해 주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낭만의 어떤 매개물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산을 잠시 떠올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