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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May 13. 2023

내 첫사랑과의 만남​

일요일 아침이라 늑장부리며 침대 속에서 몸을 뭉개고 있었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했다. 아침 10시쯤 전화가 왔다. 중학교 친구 예나가 동생이 미술 전시회를 한다는 초대 전화였다. 전시가 오늘까지라고 해서 부랴부랴 챙겨서 나가야만 했다. 중학교 후배이기도 한 고향동생이 전시회를 한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궁금했다. 친구 혜숙이와 갔다. 


압구정로데오 한복판의 모던하고 세련된 갤러리였다. 3층이어서 엘베를 탔다. 엘베에는 일가족 3명이 함께 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다. 엘베 문이 열렸고 예나와 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와 껴안은 건 우리가 아닌 먼저 내린 일가족 세 명이었다. 


"길상아~"  


‘뭐라? 길상이라고? 나의 첫사랑 길상이?’ 


그렇다. 길상이와 예나는 사촌지간이었지. 순간 나는 내가 드라마 주인공이 되고, 그 뻔한 드라마 속 재회 장면을 상상했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오로지 주인공 남녀 두 사람만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을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슬로우모션 같은 건 없었다. 오직 그의 아내와 예쁜 딸아이가 한 셋트로 서있는 것만 보였다. 나는 어색함으로 무장한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로봇이 되었다.


"현숙이? 내가 아는 그 현숙이?"

라며 길상이는 나를 간신히 알아보는 듯 했다. 

‘뭐야, 나 성형미인도 아닌데 몰라봐? 쌍수는 했다만 30년도 더 된 일인데’

잠깐 아주 어색한 인사만 나누었다. 사실 어떻게 인사를 나누었는지도 생각나질 않는다. 두 시간 전에 전화 걸어 헐레벌떡 달려오게 한 예나가 야속하기만 했다. 첫사랑을 만날 줄 알았더라면 삐죽 나온 새치와 늘어진 팔자주름을 당당한 자연미라 우기며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2 어느 날 예나는 등굣길에 내게 줄 편지 한 통을 들고 호들갑이었다. 일명 러브레터였다. 너무 떨려 화장실 한 칸에 예나와 들어가 길상이가 준 편지를 읽었다. 때는 5월이었는데 편지를 읽는 동안 식은땀을 한바가지는 흘린 것 같다. 그때의 긴장과 떨림을 시작으로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너무 순수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우리는 따로 만나 얼굴을 본 적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다. 단지 편지만 오고갔을 뿐이었다. 한 해 선배인 그는 곧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떠났고 그 이후로는 나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주소도 전번도 알 재간이 없었던 때라 그저 일기장에 꾹꾹 눌러 담은 그리움의 흔적이 다였다. 7년간의 긴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은 건 대학 2학년 때였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기나긴 짝사랑에 나는 많이 지쳐 있었고 아마 새 출발을 위한 정리 작업 정도였을 것이다.


아카시아향이 필 때쯤 어김없이 첫사랑 길상이를 막연하게 떠올리곤 했다. 실체에 대한 그리움이기보다 첫사랑에 부여되는 아련함이라고 할까. 시골 중학교라 학생 수가 몇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마음만 먹었다면 예나를 통해 얼마든지 전번을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수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었다. 살아오는 내내 그 아름다운 기억들은 문득문득 나의 감수성을 깨워주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쯤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몇 자 끄적였던 흔적이다.

[ 아카시아 향기 ]

밤 산책길을 택한 건 
오롯이 아카시아 향을 맡고 싶었기 때문이다.

향기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일까?
그 움직임은 
가닥가닥 일까
듬성듬성 일까
양떼구름처럼 일까
모닥불 연기처럼 일까

아카시아향기가 찰나 내 코끝을 때리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유혹에 못 이겨 다시 코를 벌름벌름 해보아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문득 중2때 받았던 첫사랑의 러브레터 생각이 난다.

‘분명 길똥이는 가만히 있는 내게 지가 먼저 사랑고백을 해왔었지.
아카시아향기처럼 내 코끝에 찐하게 와 닿고는 어느새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지.
난 7년 동안 그 향기를 기다려보기도 쫓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는 맡을 수 없었지
나의 긴 첫사랑은 그렇게 무색무향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지‘

그래, 
향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런 첫사랑 같은 거구나.


근데 그 첫사랑 길상이를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노골적으로 그와 마주서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덕살은 내게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언뜻언뜻 몇 번 그를 훔쳐보았다. 관람을 하며 스쳐 지날 때 이야기를 나눌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나온 긴 세월의 안부를 묻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 그냥 피했다. 주변머리 없이 건넨 말이 겨우 한마디였다. "딸이 너무 예뻐요. 아빠를 많이 닮았네요" 고작 그 한 마디. 돌아오는 길에 두고두고 후회하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첫사랑과의 재회는 의외의 큰 여운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첫사랑은 그때 그 모습으로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 좋다고, 그러니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좋았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을 지녔으며 무엇보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참 보기 좋았다. 멋있게 나이든 내 첫사랑 길상이었다. 가물가물해진 어린 시절의 길상이 대신 선한 인상의 희끗희끗한 흰머리의 어른 길상이로 내 첫사랑은 세대교체를 했다. 먼저 사랑고백을 하고선 잠수를 타버린 그의 사랑 방식에 적잖은 당황과 원망을 했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만남이었지만 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은 다행히 부셔지지 않았다. 여전히 가슴 설레고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녁 산책길에 온통 낮의 미술관 광경들로 되감기 하며 걸었다. 그때 갑자기 아카시아 향기가 훅 하고 내 코끝을 때리고선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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