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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Oct 18. 2020

고통의 수준 예상하기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얀 드로스트

가을만 되면 다래끼 때문에 고생한다. 예전엔 눈이 아픈 것 같은 아주 미미한 통증에도 곧바로 약국에 가서 항생제를 사 먹었다. 이틀이면 바로 가라앉았는데, 재작년부터는 항생제 개수를 늘렸다. 벌써 항생제 한 알에 내성이 생긴 것 같다. 병원에 최대한 늦게 갔는데 이미 약으로 처방할 수 없는 상태라며 째야 한다고 말했다. 칼로 그 부분에 상처를 내고 염증을 걷어내는 방식인데 저번에 해봤으니 알 거라며 10분 후에 수술실에서 보자고 말했다.


마취주사가 눈꺼풀에 들어가는 순간, 고통이 심해서 소리를 지를 수 없었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마취 주사를 맞고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아직 째지 마세요. 칼 대실 때 말해주세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네 아직 안 했습니다...(몇 초 후) 다 했는데 안 아프시죠?'

'아 벌써요? 마취가 잘됐나 보네요.'

'이상한 게, 이 마취가 쌍꺼풀 하기 전에 놓는 주사랑 똑같거든요. 근데 다래끼 수술할 때는 고통스러워하시고 쌍꺼풀 수술 전에는 참을만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빨리 괜찮아져라


사람은 고통의 수준을 예상하기에 따라 다른 강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 같다. 한번 다래끼를 짼 적 있어서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고 있었기에 무조건 '아프다'는 상태에만 몰두했었다. 5분 지나면 사라질 고통에도 '참기 힘들다'는 예상만 하고 병원에 왔었다. 반면에 쌍꺼풀 수술이라는 큰 결심이 필요한 일에는 이 정도의 고통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견딜만한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긴 어떤 이별은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타격이 덜했다.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마지막, 죽음을 예상하는 건 어떨까?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비교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를 인정하지 못해 오랜 슬픔에 잠식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 어떤 죽음이건 결국 인간은 죽는다는 진리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고통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견된 죽음과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예상할 수 없었기에 그 고통의 수준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다를지라도 '언젠가 죽는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철학자 괴테는 갑작스러운 어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것을 알았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괴테를 향한 비난이 이어졌다.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의 저자 얀드로스트는 우리가 너무 낭만적인 감정을 지나치게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이론을 소개하며 '파괴적인 감정은 교육적인 실패'라고 까지 비판했다.


고통의 수준은 스스로 예상하고 관리해야 하는 부분임에도 남에게 그 수준을 쉽게 강요하기도 한다. '아프다는 사람이 책을 읽을 정신은 있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아프기 때문에 책으로 도피했는지, 책에서 고통을 치유하도록 돕는 글이 있는지, 아파서 책밖에 볼 수 없는 사정이 있는지는 나만 안다. 아픈 사람은 고통의 감정에서만 허우적 거리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제멋대로 쌓아놓은 셈이다.


사실 스스로 고통의 수준을 예상하기도 어렵다. 너무 과하게 예상하여 도전을 멀리할지도 모르고, 너무 쉽게 무모해져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짐작해야 한다. 나에게 다래끼가 그런 존재다. 내년에 또 올 거니까 미리 예상을 해둬야 한다. 그리고 다래끼보다 더 확실한 진리같은 명제들이 널려있다. 인간이기에, 나 자신이기에 겪을 일에 고통을 짐작해두자. 스토어학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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