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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Sep 17. 2021

나는 여행이 안땡겨

여행 취향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가야 한다. 나를 옭아매는 그것으로 멀어질 수 있다면 최대한 열심히 반대편으로 달려야 한다. 그래서 남는 게 뭐냐면, 그것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게 회사건, 가족이건, 친구건, 종교건 연인이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도저히 도망쳐지지 않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러면 일이 좀 복잡해지고 인생이 괴로워진다. 나는 그럴 때 절대로 여행 가서 '기분 전환'이라던지 '일상 탈출' 같은 거 못한다.


도피하려고 여행하지 않는다. 도피가 안된다. 여행하고 돌아와도 일상은 굳건히 자리 잡다 못해, 오히려 심해져있다. 그런 시기에 여행지에서 아무리 엄청난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전혀 즐기지 못한다. 여행을 가려면 일상이 괜찮아야 한다. 반드시 지금이 좋아야 떠나도 좋더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게느 그저 강처럼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느끼고 의식이 깨어 있는 이들은 열차와 자동차, 배가 일으키는 끔찍한 히스테리 때문에 잠들지고, 깨어 있지도 못한다. 불안의 책, 페소아


올여름은 가고 싶었다. 호텔에, 빠지에 예약은 다 했지만 코로나가 또 심해져서, 어쩔 수 없었다. 친구들 모두 걸리기라도 하면 직장에서 큰 화가 있으므로 안전하게 지내자고 말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정신상태라 기대했었는데, 아쉬웠다. 그리고 다른 휴가를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일상이 괜찮으니 굳이 다른 데 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돌아다니면 꼭 집에서 한나절은 쉬어야해


괴로운 일상에서는 여행 가기 싫고, 일상이 괜찮으면 여기도 좋으니 다른 곳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문득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일까. 여행을 좋아해야 트렌디하고, 젊고, 멋져 보이긴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미 글러먹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는데, 여행지에서 모든 새롭게 보였던 것들이 익숙해지면 원래와 비슷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여행지의 마음으로 일상을 주시했더니 완전히 새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냥 신기하다, 뭐지? 하면서 정말 집중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낯설게 느껴진다.


예전에 최인철 교수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을 조사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의 스트레스 지수가,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연구결과를 읽고서는 충격받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여행하는 것처럼 살구나. 갑자기 억울해졌고, 나도 반드시 일상에서 여행을 해야겠다. 그러려면 좋아하는 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확신에 가득 찼다. 아마 그때부터는 퇴사-이직을 반복해 회사에서 의미를 찾는 것보다 취미를 늘려가며 재미를 찾아나간 것 같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면 산만했던 여러 생각들이 정리가 됐다. 몰입하고 있는 기분도 좋다. 사실 몰입할 때는 좋은지 어쩐지 느낌이 없는데 마침표를 찍고 난 그 순간의 성취감 때문에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여행을 가진 않지만 휴가를 길게 냈다.

저기 위도 잘 보여요

시골에서 키우는 나무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집에 가져올 만한 아름다운 것들은 화분에 담아올 예정이다. 창고가 늘 한가득인데 아빠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치우고 싶어서 정리할 예정이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으려고 총 4권의 책을 챙겼다. 바다도 꼭 들릴 거고, 농막 겸 만들어 놓은 산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다시피 할 거다.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로 했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잘 안 터져서 상관없었다. 충분히 여행하는 것 같았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빠랑 나는 날씨가 좋으면 산에 올라갔고, 정상에서 해상풍력단지와 위도가 보이는지 확인한다. 나보다 시력 좋아서 항상 먼저 찾아낸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었다.


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석양은 그저 석양일 뿐인데 그것을 보러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행을 하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리스본을 떠나벤피카에만 가도 자유를 느낀다. 리스본을 떠나 중국까지 간 어느 누구보다 강열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의 책,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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