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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Jan 26. 2023

30년 만에 재취업한 엄마의 자소서를 읽으며

효도하자

엄마가 아모레퍼시픽의 전신 '태평양'에서 근무했다는 건 아모레퍼시픽의 주가가 급등했다는 기사로 한참 들썩일 때였다. 방송에서는 중년 여성이 은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지 몰랐던 주식이 몇 천 단위로 올랐다며 아들 등록금에 보태겠다고 기뻐했다. 그때 엄마는 나도 주식 많이 받았는데, 다른 직원들에게 팔아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회사가 어디였냐고 물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엄마는 서랍 속 사진첩을 꺼내서 당시에 사내 체육대회 사진에서 활약했던 모습과 고작 100명도 안 돼 보이는 단체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나를 낳지 않았고, 시골로 시집오지 않았으면 엄마는 지금쯤 대기업의 임원이 됐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독립'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 하게끔 내버려 뒀다. 주변에 학구열 높은 엄마들, 자취방에 들려서 청소해 주고 냉장고를 채워주는 엄마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엄마는 자취방에 오겠다고 하지도 않았고 보고 싶다고 내려오라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가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만 독립적이지 않은 모습은 은연중에 피하게 된 것 같다.


어릴 적 그놈의 독립이 나에게 너무 빨리 요구되고 있다고 느꼈지만 서른 중반쯤 되니, 나는 나 스스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긴다. 그리고 어쩌면 가족도 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기대하기도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할때부터 자기 손을 떠났다고 느꼈다고 했다. 본인이 도와줄 게 적어졌으니 독립심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막내까지 독립할 즈음에 엄마는 박물관에 취직하셨다. 거의 30년 만에 새로 시작하는 사회생활이 어려울 법도 한데 싫다면서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자소서 항목에 맞춰 엄마의 인생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족을 위해 희생했을 젊은 날의 시절이 순식간에 몇 문장에 쓰이는 게 씁쓸하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고 어디서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랑 나는 퇴근시간이 똑같다. 내가 집으로 걸어갈 때 엄마는 운전할 때에 주로 통화한다. 하루를 마치는 피곤한 저녁인데도 스트레스보다 있었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재밌다. 그렇게 희한한 사람이 있냐며 험담도 하면서 낄낄 거린다. 최근 하기 싫은 업무에 배정받을 때에 극도로 예민하게 구는 건 마치 나 같기도 했다. '엄마 쉬운 일은 없어 엄마가 늘 말한 거잖아'라고 놀릴 때가 오다니!


요즘은 엄마를 보면 내가 더 설렌다. 엄마의 진짜 독립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엄마와 막둥이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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