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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Apr 25. 2020

갑자기 낯설어진 사람

#03 독서에세이 / 철학자의 사물들


10살 때쯤인가, 앞집 구멍가게 할머니를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너무 낯설어지더니 처음 본 사람 같았다. 득달같이 엄마한테 달려갔다. '엄마, 구멍가게 할머니 말이야, 계속 보니까 딴사람 같더라고. 혹시 다른 사람 아니야? '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나는 남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터득해냈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것도 오랫동안 생각하면 생소해진다는 사실 말이다. 


어느 날 내 능력과 관련된 괴담을 들었다. 매일 거울을 보며 '너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 이를 '게슈탈트의 붕괴'라고 불렀는데 일본에서 꽤 유행하던 도시 전설이자 괴담일 뿐 이론이 아니다. 


게슈탈트라는 심리학적 용어는 존재한다. 1962년 맥길 대학교 Leon Jakobovis Jsmes가 자신의 박사 학위논문에 처음으로 기재하였다. 이는 단어와 같이 형태가 고정되어 있고 반복적인 신호가 계속 발생하면 신호에 대한 반응이 일시적으로 둔감해지면서 의미가 추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미시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많다. 나는 '김아울'이라는 이름 자체, 구멍가게 할머니의 얼굴이라는 형상 자체에 집중해서 일시적으로 생소해 보였을 것이다.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 등 전문가들은 미시감을 자주 경험했을 것 같다.. 필요할 때마다 미시감을 불러낼 수는 없지만, 미시감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특히 이 책에서 철학자 장석주는 평범한 사물을 오래 생각한 흔적이 돋보인다. 그는 나처럼 사물의 외관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서문에서 자신을 '나는 행복한 사물 감식가'라고 불렀다. 그가 행복을 평범한 사물에서 느꼈다면 나도 흔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사물들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철학'만 하면 된다.


그런데 철학은 어떻게 하는 걸까. 비전공자인 나는 관련된 책을 읽거나, 궁금한 질문을 유튜브에 검색해 철학자들의 강연을 듣는다. 새롭게 깨닫게 된 일에 대해 그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하는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반드시 심오한 주제일 때만 철학에 가깝다고 오해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와 같은 거시적 담론. 그런 물음은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아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진이 빠진다. 논의만 길어지다가 이러한 말들이 삶과 맞닿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즉시 중단하기도 쉽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철학이라는 분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어 피로감을 쉽게 느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일상에서 쉽게 철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물들을 오래 유심히 바라보고 사유하며 그것이 철학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사물들은 총 서른 개로 우리가 늘 보고 만지는 물건이다. 이런 사물들을 분류한 목차에서도 상상력이 돋보인다. 다섯 개의 챕터로 관계, 취향, 일상, 기쁨, 이동으로 나눠져 분류되어 있는데 뚜렷한 원칙이 아니라 느슨한 형식으로 묶었다. 그는 삶과 죽음, 주제와 타자, 꿈과 기대, 욕망과 무의식, 기호와 교환에 대해 묻고 답했다.


내가 요즘 사랑하는 사물은 얼마 전 구매한 족욕 대야이다. 15분간의 경험은 그날 밤 내내 근사한 기분을 지속시킨다. 발을 담그면 금세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몸을 전부 담그지 않아도 따뜻해진다.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발만 담그고 있다. 족욕을 하면서 책이나 영상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연락도 해봤지만 끝났다는 알람이 울리고 나면 족욕한 기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준비한 기억과 치워야 하는 행위만 남는다. 어떠한 여운도 없고 발만 퉁퉁 부어있다. 너무 허무해서 그 날 이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발을 담근 후에는 적당한 온도는 느끼고 내 앞에 놓인 발을 만지고 땀을 닦는다. 오롯이 한 가지에만 집중하니 확실히 만족감이 크다. 족욕을 한 날에는 그 일이 하루 중 일어난 가장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저자도 욕조를 꽤 사랑하나 보다. 그는 '목요일의 슬픔, 슬픔의 목요일의 우울에 빠진 사람에게는 작은 욕조가 필요하다... 거기서 오는 위안과 낙관주의가 나를 나쁜 종말론에서 구제한다'라고 표현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꽤 거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보다 더한 표현이 있다면 그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공감한다. 


오늘도 글을 다 쓰고 나면 나의 작은 욕조 안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철학하려고 한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시간을 누리는 여유를 만끽하면서. 그리고 천천히 이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임을 깨닫겠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조금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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