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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Apr 19. 2020

내겐 너무 많은 선택

#02 독서에세이 /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투명사회

오늘 아침 인스타에서 160만 원짜리 아이폰 11 pro를 자랑하는 친구의 피드를 보고 허무했다. 나는 작년에 맥북을 150만 원 주고 샀기 때문이다. 노트북보다 비싼 핸드폰이라니. 애플의 높은 가격 정책을 비판하기보다 나는 왜 더 살 수 없는지 초라하다. 세상에는 항상 매력적이고 갖고 싶은 것이 차고 넘친다.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자기 계발을 해야겠지? 자기 계발서를 혐오하는 부류지만 자기 계발서와 엇비슷한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서를 읽지 않고서도 자기 계발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자기 계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언제까지 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친구 J는 선택을 유난히 어려워했다. 그에게 '내가 정해?'라는 말을 내뱉기 일쑤였고, 자기 자신도 그런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했다. '응 대신해줘. 나 그런 거 좋아해'라고 말했다. 상대방이 대신 결정해주는 걸 좋아할 필요까지 있나 싶으면서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택 앞에서 스트레스받았을지 안쓰럽다. 나는 J와 비슷하게 가벼운 결정 앞에서도 머뭇거리는 친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친구들의 모임 장소, 저녁 메뉴, 커피 등 말할 기회가 생기면 분명하게 말하는 편이다. 그러나 간혹 내가 선택한 메뉴가 맛이 없었을 때 움츠려 드는 건 나였다. J는 선택하는 과정과 결과에 아무런 책임이 없어 보인다. 


나의 부끄러움은 선택의 결과다. 우리는 수치스러움을 피하고 싶어서 선택하지 않기도 한다. 저자는 '수치는 필연적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 결코 완벽히 충족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라고 말한다. 맛없는 음식은 내 탓이 아님에도 나는 오로지 내가 그 상황을 움직였다고 판단한다. 이 것 또한 '수치의 초점은 나를 향한다. 타인 앞에서 시선을 떨구고 타인의 결점 대신 나 자신을 자책한다'라고 대변한다. 선택은 수치를 낳는다.


최근에 전공과 다른 분야에 이것저것 발을 담갔다. 결국은 중간에 포기했는데 나의 적성과 맞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적성이 뭘까? 친구 B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는데 알고보니 동생은 물론 사촌 모두가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했다고 한다. IT의 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가족들은 모두 컴퓨터전공으로 직장까지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하고 있었다.  의사집안, 사업가집안, 4대 맛집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적성이 모두 다를텐데 선택의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B에게 진로변경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족들이 추천해서 지원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맞았다'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쉽게 말하는 게 오히려 허무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말을 실천한 인간 중 한 사람같다. '인간은 어떤 대상이 필연이라고 상상하는 한 그 대상의 존재를 긍정하며, 반대로 어떤 대상을 우연이라고 상상하는 한 그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다'라고 말했다. H는 공대생이 되기로 한 선택을 자신의 필연이라고 생각한걸까? 필연을 운명이라고 믿는 선택도 능력이다.


한국직업사전에서는 우리나라 직업의 수를 12,145명으로 나타냈다(최신 2018). 게다가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직업의 수가 1/3로 매우 적은 수치다. 많은 고민과 선택지 앞에서 매일 흔들리는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길을 믿고 우직하게 걸어가고 있다. 운명이라고 말하는 건 늘 과거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없다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사후세계를 믿고 현생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신자처럼, 내가 원하는 미래를 확고하게 믿어야 작은 선택을 이어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많은 선택을 차단해야 한다. 하나의 운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긍정보다 수많은 부정이 필요하다.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 과잉이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든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자기 계발서가 긍정 이데올로기를 조장한다고 우려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를 품게 하고, 사고의 힘에 잘못된 희망을 품게 한다. 이 이론들은 개인은 전능하다는 생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용한다'라고 말한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서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할 수 없으므로 부정해야한다. 부정 없는 세계는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는 방임과 혼란이 가득한 세계다. 우리가 선택을 두려워하고 불행한 이유다. 


나에게 슈퍼파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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