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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Aug 02. 2020

집주인과 가사도우미의 관계

#05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단편소설 하나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결혼하게 된다면 일주일에  번은 가사도우미를 부르고 싶다.  서비스를 아깝지 않게 지불할 정도의 밥벌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몇몇 결혼한 친구들도 '가사도우미' 정말 유용한 서비스라고 지지해줬다.  2 저택에 살지 않아도 숙련된 가사노동력을   있게 있다는  아직도 어색하다. 시간 단위로 이용할  있다는 사실을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에 이런 일은 생각하면 영화 기생충의 '문광', 영화 '하녀' 전도연이 했던 역할이 먼저  떠올랐다.   어딘가에 살면서 집안일의 하나부터 열까지 책임져주는 사람.  그러나  노동은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영화같은 충격적인 에피소드는 아니어도 어떤 사연이 생기게 된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 중 '도움의 손길'이라는 단편은 맞벌이 직장인 부부가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단순해 보이는 일에도 갑과 을의 처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부부의 삶, 가사도우미 직업을 가진 사람의 일에 대한 태도를 관찰할 수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일하는 8090년생이다. 다섯 번째 단편 '도움의 손길'에서도 젊은 맞벌이 부부가 나온다. 남편은 정유사, 아내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착실한 직장인이다. 7년의 결혼생활 끝에 이번에는 대출을 끼고 괜찮은 아파트를 공동 명의로 구입했다. 이 집은 꽤 마음에 들어한다. 신도시의 28평 아파트, 그래서인지 도면도 자주 들여다보고 인테리어에 대한 생각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설렌다.




청소는 언제나 여자의 몫

아내는 고작 두 평 더 넓어진 집을 청소하기 버거워 가사도우미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내 '자기가 먹고사는 공간 정도는 마땅히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를 부리는 위치에 있다는 느낌이 불편하고 싫을 것 같았다'라고 생각한다. 청소에 대한 생각은 주로 여자의 일이다. 집안일은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나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도 그렇다. 남편은 아내의 해결방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느니 그게 낫다는 식이다. 가사도우미도 물론 여자다.  


남편은 내일 도우미 아주머니가 올 걸 생각해서 설거지를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처음 오시는데, 어떻게 하는지 볼 겸'이라고 말하자 아내가 정색을 한다. 그러고는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다. 식기세척기가 없는 집도 아니었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도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는 모습에서 갑의 군림이 느껴진다.


아내는 이런 남편의 태도가 불편했다. 그러나 점점 간섭하고 고집부리는 아주머니의 청소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 말이 많아서, 자신의 고집대로 세탁물에 들어갈 세제를 조절하는 것, 물어보지 않은 청소 방식에 대해 으스대는 말투가 거슬린다. 청소가 끝난 후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없다. 집안일이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해야 하지만, 유난히 까다롭게 예민하게 구는 것처럼 보인다. 적당히 상냥할 수도 있을 텐데 늘 퉁명스러운 태도로 일관한다. 설거지를 일부러 남겨두자고 한 남편의 모습이 아내에게도 비친다. 굳이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사적인 영역에 타인이 들어올 때

집이라는 공간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다. 매일 먹고, 자고, 씻고, 쉬기에 최적화된 곳. 거기에 놓여있는 사물을 보며 아주머니는 다양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나는 분명 가사도우미에게 청소일만 맡기지만 그분은 결국 내가 모르는 나의 은밀한 면을 보게 된다. 알게 된 것도 모른 척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크지만 이 책에서 등장하는 가사도우미는 집에 놓인 성경책을 보고 내 종교를 물어본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내 물건을 보고 짐작하기 때문에 꺼름직하다. 아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이 분은 또 다른 물건을 통해 무엇을 더 짐작하고 오해할지 소름 끼친다. 얼마 전 에어컨 수리기사님이 건조대에 걸어진 수영복을 보고 어느 수영장에 다니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빨래를 볼 순 있지만 그걸 보고 내 사생활을 들킨 기분이 불쾌했다.


한번 어긋나는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다. 아내는 일하는 아주머니의 고집, 점점 안일해지는 청소 태도로 불만이 쌓인다. 분리수거도 제대로 하지 않고, 화장실 청소도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아내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나름의 청소 방식도 단순화시켜봤다. 그러다 결국은 아주머니를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청소를 마치고 문을 나설 때 아주머니가 말한다.  ‘새댁, 나 다음 주부터는 못 와요’ 라고. 매주 오라는 곳이 생겼다고 말한다. 일을 바꾸고 싶어 하자 아내는 '저희 집도 매주 오셔도 돼요'라고 대답한다. 아내가 아주머니를 가볍게 대한만큼이나 일하는 사람도 비슷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의 진짜 서운한 부분이 나타난다. 청소시간에 점심시간이 겹치면 먹을 것도 챙겨주고 그래야 아줌마들이 좋아한다고. 결국 사람이 아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배려와 인정을 기대하게 된다. 일이야 돈을 더 주는 사람에게 가면 그만인데, 그걸 지속하게 하는 것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


집에 냉장고가 고장 났을 때 오는 수리 기사님께 늘 마실 음료를 준비한 엄마가 떠올랐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랐으면서도 나는 그런 면모를 닮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라도 음료를 주는 집에 나사 한 바퀴라도 더 조일 것 같다. 그러나 일과 그에 따른 보상 외에 왜 이렇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지 피곤하다. 그 아주머니도 간식을 원했으면 주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요청했다면 분명히 줬을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아내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 편에서 아주머니의 태도를 희한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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