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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Sep 07. 2016

천재 예술가가 불행해지는 이유

에단 호크 주연 <본 투 비 블루> 리뷰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아마데우스>는 엄밀히 말해 모차르트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음악사를 통해 실존 인물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을 복기하는데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아마데우스>는 그의 이름과 음악만 차용했을 뿐 거의 거짓말이라고 느낄 거다. 사실 이 영화의 관심은 천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 관심을 쏟는다. 관객은 모차르트의 출중한 실력이 전개될 때면 그의 천재성을 선망하며 마치 자신이 천재가 된 마냥 우쭐해진다. 궁중 파티의 테이블 밑에서 연인과 음담패설이나 주고받는 이가 급히 뛰어나가 자신이 작곡한 훌륭한 곡을 지휘하는 남자로 돌변하는 모습은 매혹적이다. 반면 살리에르의 번민이 한참 전개될 때면 평범한 사람의 비애, 천재를 향한 질투에 빠진다. 자신의 일에 소명을 갖고 근면하며 헌신적인데다 겸손한 궁중악장 살리에르 입장에서 보면 건방지고 방탕하지만 자신보다 음악적으로 뛰어난 모차르트를 보면 신이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관객은 두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선망과 질투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지만 남이 나보다 뛰어난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민낯을 확인한다.   

<본 투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영화도 재즈 영화도 아니다. 그를 사랑한 재즈 매니아에게는 실망스러운 ‘조작극’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관점에선 한 천재 뮤지션의 인생사는 영화 속에서 왜곡되고 심지어 존재하지 않은 연인과 만드는 로맨스는 그의 열정적인 재기 과정을 조명하는데 쏟을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천재성과 일상성이 불화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쳇 베이커(에단 호크)는 전성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마약에 찌든 삶을 살다 자신의 전기 영화를 만들자는 허리우드의 제안을 받은 후 배우 생활에 매진한다. 하지만 갱의 습격으로 치아 여러 개를 날려먹은 후 영화는 무산되고 그의 생명과도 같은 트럼펫 연주도 못 하게 된다. 자신의 엑스 와이프 역으로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제인(카르멘 에조고)이 그를 돌보며 재기를 돕는다. 연주를 하려면 잇몸에서 피가 쏟아지지만 다시 트럼펫을 불겠다는 쳇 베이커의 열정은 뜨겁다. 이미 가난해져 작은 차 안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트럼펫은 그의 인생을 다시 일으켜줄 유일한 수단이다.    


그의 노력을 위태롭게 만드는 건 도처에 깔려 있다. 감옥에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면 마약에 다시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멀리 하는 게 쉽지 않다. 넌지시 헤로인을 건네주는 아무 생각 없는 어느 팬만큼 유혹은 가깝지만 의지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 하면 감옥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담당 감시관의 압박도 부담이다. 조금만 더 나아지면 트럼펫 연주로도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기다려주지 않는다. 밴드를 좀 구성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돕지 않겠다는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프로듀서 딕(칼럼 키스레니)의 냉담함도, 연인 제인의 부모가 보내는 회의적인 눈빛도 다시 일어서겠다는 그를 고달프게 한다.    

고생스러운 시절을 보낸 끝에 음반사도 그의 앨범을 다시 낼 준비를 하고 떠났던 딕도 돌아온다. 이제 모두가 주목하는 라이브 공연 하나만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는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제인도 관객석에서 그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극심해지자 쳇 베이커는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 앉아 마약 치료용으로 복용하는 메타돈과 헤로인 사이에서 고민한다. 딕은 헤로인이 없어도 잘 해낼 거라 말한다. 텅빈 채 올라가지 말라고 한다. 쳇은 헤로인을 투약하면 환상적인 공연을 했다며 그게 자신감을 불러낼 것 같다고 말하지만 친구는 ‘그건 약 때문이 아니라 원래 네가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여기서 무너지지 말라 한다. 한참 후 쳇 베이커는 무대에 다시 오르고 끝내 멋진 연주를 펼친다. 하지만 바램과는 달리 그는 마약에 다시 쩐 채 서 있다. 뜨거운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의 모습과 배신감과 절망감에 자리를 빠져 나오는 연인의 모습이 한 화면에 담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시작부터 내내 공들여 쌓은 탑을 한 순간에 뒤집어 엎어버리고 끝내는 느낌이다.

예술가가 생활도 건전하게 하면서 천재성도 꾸준히 보여주면 될 일을...주위를 봐도 비범함과 일상성을 병행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천재성과 일상성의 불균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재능이란 게 배고픔, 고독, 수치심, 분노 등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곧잘 형성되기 시작한다.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게 예술적 결과물이다. <본 투 비 블루>에서도 주인공의 재능이 아버지와의 불화에서 기인했음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비하하는 언사는 그를 뾰족하게 만들고 타협할 수 없는 스타일을 만든다. 동시에 커서도 주변 뮤지션들의 무시에 몸서리친다. 그에게 있어 타인의 냉담한 시선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줄수록 치유의 길은 멀어진다. 사람도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안 가본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특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가능한 길이라면 더 그렇다.     

문제는 천재성을 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파멸적이라는 거다. 마른 모델이 자신의 체형을 유지하려고 애쓸수록 거식과 폭식을 오가게 되고 결국 삶을 살아갈 밑천인 몸 자체를 망친다. 예술적으로 아름답다는 것과 비정상은 수용자 입장에서는 멋대로 해석되고 구별될 뿐 당사자에겐 모두 삐뚤어진 길일 뿐이다.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은 노력의 결과로 오르게 되는 ‘경지’가 아니라 비정상이 폭주하다 잠시 매혹적인 모습을 띄는 일시적인 ‘상태’일지 모른다. <본 투 비 블루>에서 쳇 베이커는 전성기를 되찾기 위해 맹렬히 연습하지만 결국 그 과정은 쇠락을 맹렬하게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친구는 ‘뛰어난 재능은 약이 아닌 네 안에 있는 거다’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천재성은 약에 있지도 않지만 한 인간이 꾸준하게 지닐 수도 없다. 영화가 ‘쳇 베이커가 자신의 전성기를 연기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설정을 꾸며낸 것도 천재성이라는 게 한 사람 일생에 머무르기엔 휘발성이 강한 것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답기도 어렵다는 게 아이러니다.     

물론 예술이 자신의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만으로 탄생하는 건 아니다. 건전한 과정을 통해서도 감동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창의적 활동은 항상 자신의 뜻대로 컨트롤하기 어렵다.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도 노력에 비례해 결과가 돌아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천재성이 한 사람에 내재해 있다기보다 영감을 주는 신이 머무는 동안만 천재성을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와 반대로 현대인들은 결과를 모두 자기 내면 안에서 찾으려 하는 실력주의(Meritocracy)가 예술가의 스트레스를 극대화한다고 지적했다. 천재성은 근본적으로 신이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어떤 경지나 천재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그것을 원할수록 영혼은 파괴되기 쉽다. <본 투 비 블루>라는 영화 제목처럼 천재는 우울하기 쉽고 화려함 뒤에는 그림자가 짙기 쉽다. 그렇게 천재 예술가의 삶은 불행해진다.


http://tvpot.daum.net/mypot/View.do?clipid=76474785&playlistid=58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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