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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Sep 09. 2016

어느 밀정의 달콤한 인생

영화<밀정> 리뷰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제작된 다수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이런 시대극은 성공하지 못 한다는 게 업계의 논리였는데 <암살>이 천만을 돌파하고 <덕혜옹주>도 500만을 돌파하는 등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암울함이다. 특히 엔딩이 밝기 어렵다는 것이 대중성의 발목을 잡아왔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선명’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기도 쉬워 상상력이 위축되기 쉬웠다. 대표적으로 故장진영이 주연한 <청연>은 작품의 완성도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화판이 쓴 전략은 시대 전체는 암울했을지라도 특정한 부분에만 포커스를 두어 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전쟁에서 지고 있더라도 전투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 주자는 식이다. <암살>은 일본 고위 간부들을 암살하는 과정에 집중함으로써 부분적일지라도 확실한 승리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또한 말미에 염석진(이정재)을 처결함으로써 관객들에게 확실한 보상을 제공한다. <덕혜옹주>는 역사를 왜곡했다는 분명한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https://brunch.co.kr/@kimpd/20) 민족적 자긍심을 결말까지 쥐고 갔고 ‘귀국’을 어떤 성취나 해결로 끌어감으로써 이야기의 감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더불어 관객들도 이분법적 틀에서 조금은 벗어나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거리 두고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된 것 같다. <밀정>도 이러한 두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내용 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밀정>에서 이정출(송강호)은 한때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그러다 독립군 정보를 팔아넘기고 투항하여 일본 순사로 변절한다. 출세욕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독립이 안 될 것 같아서 그저 먹고 살기 편할 것 같아 줄을 갈아탔다. 영화 첫 장면에선 독립군 옛 친구 김장옥(박희순)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정출은 그를 죽이지 않기 위해 애쓴다. 생포하라는 상부의 지시였는지 인간적 연민이 앞섰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여리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영화 전반에서 이어진다. 또 한번 배신을 한 사람이라 또 배신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까 조심스럽다. 자신의 의열단 ‘소탕’ 작전에 다른 경쟁자를 붙이는 일본 상부의 진심을 읽고 싶어 초조하다. 이정출은 장사치로 돈을 벌고 싶다며 조선인들에게 접근하여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잡을 계획을 세운다. 한편 장사치로 위장한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공유)은 이정출의 속내를 알면서도 그를 역이용하기 위해 모른 척 그를 의열단 내부로 끌어들인다.

상해에서 정채산과 이정출은 서로 신분을 드러낸 채 생각보다 빨리 조우한다. 그리고 정채산은 이정출에게 의열단이 지닌 폭탄을 경성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이정출은 흔들린다. 사실 그는 흔들릴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렇게 하겠다고 뜨겁게 호응하고 차갑게 배신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정출은 진심으로 의열단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어디까지 도울 것인지 갈등하고 자신의 지원이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지만 진심인 것은 확실하다.

왜 그런 황당한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이런 흐름은 김지운 감독의 전작<달콤한인생>에서도 등장한다. 선우(이병헌)는 보스 강 사장(김영철)의 오더를 받고 그의 어린 애인 희수(신민아)가 바람을 피는지 감시한다. 선우는 희수가 또래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명대로 그들을 죽이려 하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살려주고 그 사실을 묻어둔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강 사장은 선우에게 배신감을 크게 느껴 그를 제거하려 한다. 한 순간 밑도 끝도 없이 결정한 선택 하나로 선우의 인생은 완전히 절벽으로 떨어져 버린다.


감독은 인간의 선택이 그리 합리적이 않다는 점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순간에도 아주 작은 이유로 결정을 뒤집기도 한다. 내적 모순이 있어도 마음의 흐름에 따를 때가 있다.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잘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다. 선우는 희수의 첼로 연주를 들으며 감상에 빠진다. 그런 달콤한 기분을 잠시 느낀 것만으로도 결정은 달라질 수 있다. 단지 죽이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이정출은 정채산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신뢰하며 간곡하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이자 흔들린다. 어쩌면 밀정 노릇을 하는 이가 그런 대접을 받는다면 꽤 달콤한 기분에 빠질지도 모른다. 배신과 음모 속에서 살면서 진심을 느끼는 건 더 강렬한 유혹이 될 수 있다.

한편 의열단이 이정출을 너무 믿고 가는 것이 의아하다는 반응도 많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나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정채산은 ‘우리에겐 사람도 없고 돈도 없다’ 말한다. 그런 현실에서 거사를 완벽하게 치르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작은 희망을 가지고 승부를 걸어볼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 과정에서 동지들이 위험할 게 뻔하다. 그럼에도 이정출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아마 그런 절박한 심정이 이정출을 더 압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정출의 달콤한 인생은 그렇게 시작한다. 경성으로 폭탄을 실고 가는 기차 안에서 경쟁자인 하시모토 팀으로부터 의열단 멤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의열단 조직 내부의 밀정을 잡는 일도 돕고 하시모토도 제거한 후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경성에 도착한 후 연계순(한지민)이 잡힌다. 이정출은 이중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고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그의 손에 의열단 조직원들은 하나씩 잡히고 모진 고문도 당한다. 그런 동시에 경성 어딘가에 숨어있는 김우진을 도우려 찾아가다 뒤를 밟혀 이정출과 김우진 모두 체포된다. 김우진은 이정출에게 폭탄을 부탁한다. 어떻게든 의열단이 아님을 입증하여 살아남아 폭탄을 적의 심장에 던져줄 것을 부탁한다.

이정출 입장에선 이제 일본 순사로 무사히 살아갈 방도가 막혔다. 밀정이라는 역할을 감안해도 의열단을 너무 많이 도와 신임을 잃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을 도우려는 것도 발각되었으니 곤혹스럽다. 퇴로가 막힌 셈이다. 재판 과정에서 이정출은 밀정이었기 때문에 돕는 척 했다고 강변한다. 진심이 아니라 전술이었다고 말한다. 송강호의 눈물 연기가 압권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독립 운동을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억울해서 또 자기 연민을 느껴 울음이 터진다. 그는 영원히 일본 앞잡이로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출은 그 울음이 의열단 단원이라는 의심이 억울하다는 울음으로 포장해야 한다. 울음은 점점 진심에서 위장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앞의 울음과 뒤 울음의 느낌이 다르다. 그 내적 갈등이 하나의 울음 안에 담긴다는 게 절묘하다.

 

그게 밀정의 숙명인 걸까? 이정출은 잠시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 나와 일본 고위 간부들의 모임에 폭탄을 던지고 친구 김장옥을 밀고한 조선인 부자를 암살한다. 그는 앞으로 독립 운동을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친일파로 남을 거다. 그는 그렇게 이루어질 없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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