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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Sep 16. 2017

피곤한 아빠가 놀아주면 좋은 놀이

[철든다는 의미]

마흔. 부모님은 노쇠해졌고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마흔을 지나면서 등에 짊어진 짐을 한번 쳐다본다. 언제 저렇게 많은 걸 얹고 있었지? 젊은 사람들은 십 년 넘게 다닌 직장과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을 보면 자리를 제대로 잡았으니 부럽다고도 한다. 하지만 자리를 제대로 잡기 위해 했던 노력, 또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모르며 하는 소리다.    


당연하다 생각한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철이 든 거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 아쉬운 것에 마음을 쏟기 마련이다. 자주 툴툴거리고 비교하며 마음 아파한다. 반면 철이 든 어른은 당연한 것이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춥지 않게 옷을 입고 다리 펴고 누울 집을 갖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 화려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 반복을 견뎌야지만 평범한 일상이 허락된다.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다. 불안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안도하면서 각자 가진 삶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몰랐다. 지금 마흔의 나이에 철이 들었다고 할 순 없지만 철이 들려면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는 알 수 있다. 어린이집에서 고단한 얼굴을 한 부모님들과 가볍게 인사하며 우리 세대만의 연대감을 잠시 느낀다. 그리고 쉰이 넘은 선배들의 어깨를 바라본다. 전보다 몸은 더 약해졌지만 지고 있는 무게는 더 많아 보인다. 과연 나는 그때 얼마의 짐을 버틸 수 있을까?    


[공습과 방공호]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종일 놀아달라고 한다. 아이들을 키우며 양해라는 게 불가능하다는데 여러 번 낙담했다. 아침 일찍부터 깨우면 피곤한 마음에 더 자겠다며 그냥 벽에 코를 대보지만 아이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원래 평일에는 저녁이 되기 전까지 TV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주말에는 오전에도 TV를 보여준다. 사실 시청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을 막으려는 방편으로 정했지만, 주말에는 부모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만든 법이다. 아이에겐 주중에 잘 지내서 허락한다고 얘긴 하지만, 이 법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일종의 ‘부모 보호법’이라면 너무 편향적인 명명일까?    


나는 끌려 나와 TV를 틀어주고 소파에 누워 아이들을 배 위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깊게 잠에 빠져 장시간 TV를 보게 하는 걸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아이들이 점점 무거워지면 잠에선 깨게 된다. TV를 너무 많이 봤다며 서둘러 그만 보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데 마음이 개운치 않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는 건데 주말 아침 아이들에게 더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숨바꼭질]

놀아주더라도 조금 더 쉬고 싶다. 아빠들이 자주 제안하는 게 시체 놀이란다. 누가 죽은 척 오래 누워있나 대결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건 실속이 없다. 아이들이 너무 빨리 지쳐 장시간 누워있기 힘들다. 아이들의 만족도가 너무 떨어져 놀이 자체를 지속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어떤 방도가 없을까 항상 궁리한다. 그래서 우선 숨바꼭질을 하자고 했다. 아이는 술래가 되고 내가 숨는다. 주로 식탁 밑에 누워있거나 장롱 안이나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 가만히 어두운 데 있다 보면 금방 잠이 들기도 한다. 아이가 찾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빠를 못 찾으면 아이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엄마가 외출 중일 때는 아이는 집안에서 미아가 된다. 지금 그냥 나갈까? 놀이의 시작이 불순하니 판단이 헛갈린다.    


얼마 전에 아이가 동물원으로 소풍을 가는데 길을 잃어버릴까 봐 무섭다고 했다. 정신없이 놀면서 선생님 잘 따라가길 걱정했는데 아이의 고민을 들으니 거꾸로 불안이 많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아이에게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 아빠, 선생님을 찾으라고 했다. 만약 없으면 경찰, 소방관 등을 찾아 이름표를 보여주고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제복 입은 사람들이 없으면 여자를 찾으라고 했다. 할머니나 아주머니에게 설명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나기 전에 제복 입은 사람은 따라가도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자리에 서서 보호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하라고 숙지시켰다. 아이와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했다.    


가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만큼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도 없다. 엄마의 절박함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며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서 떨어졌을 때 당황했던 순간들이 밀물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숨바꼭질은 이별과 재회라는 삶의 본질적인 과정을 은유하고 있다. 클래식한 것들은 모두 인생의 원형과 맞닿아있어서 영원성을 품고 있나 보다. 샤워 부스를 살며시 열었다가 아빠를 발견하면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안도와 기쁨이 가득하다. 아이를 꼭 한번 안는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우리는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했다. 그 과정은 마치 헤어지면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두텁게 하는 것 같았다. 그 확신을 갖기 위해 아이들은 그렇게 여러 번 숨고 또 찾고 있나 보다. 나도 함께 그 믿음을 얻어간다.     


아이들이 엉성하게 숨는 걸 구경하는 것도 큰 재미다. 머리만 숨고 손발이 잘 보이는 걸 보면 아직 많이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이제 조금 더 크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는 짜릿함도 느낄 거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욕구,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구도 숨바꼭질하며 자라날 거다. 쉬운 놀이 안에 많은 것이 담겨있구나 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조금씩 잠에서 깨어난다.    

 

[보물찾기]

피곤할 때 또 많이 하는 게 보물찾기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한번 여러 개의 보물을 숨겨두면 꽤 긴 시간 동안 찾아야 한다는 거다. 5개를 숨겨두고 찾기 시작하면 5~10분 넘게 진행된다. 보물이 있는 장소를 제한하는 게 좋다. 그래야 정기적으로 보물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는다. 보물은 아무거나 정한다. 보물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보물이 된다. 이런 간편함이 보물찾기의 매력이다. 아주 잘 보이는 곳부터 조금 찾기 어려운 곳까지 골고루 숨겨두고 아이들을 큰 소리로 부른다. 방에 있던 아이들이 뛰어나와 찾기 시작하면 나는 스르륵 소파에 누워 눈을 감는다.     


그런데 처음에는 녀석들이 보물을 생각보다 잘 못 찾았다. 가만히 자리에 서서 눈으로 둘러보고 잘 안 보이면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물찾기는 찾는 과정을 코칭해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숨바꼭질은 내가 숨어야 하니 그럴 수 없다. 우선 보물은 눈으로 찾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 여러 곳으로 걸어가 손으로 열어보고 들어봐야 한다. 소중한 것을 얻으려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게 보물찾기의 미덕이다. 아이들은 조금의 난관을 만나도 포기하려 한다. ‘아빠 보물이 없어요...’라고 자주 말한다. 세 살인 둘째는 하나를 찾으면 무척이나 신이 나고 그만이다. 더 찾을 생각이 없다. 계속 찾게 독려해야 한다.    

소파에 누워 아이들의 행동을 실눈 뜨고 지켜보다가 뭔가 가르쳐줘야겠다 싶으면 나 역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 한다. 입으로 가르쳐줄 수 없다. 몸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가서 들어보고 열어보며 함께 행동해줘야 한다. 고생하며 노력했을 때 결실이 있다는 것을 배우려면 결국 찾게 해야 한다. 내가 찾아주면 안 되니 보물 언저리에서 더 많은 시도를 유도해야 한다. 몸이 달아오르고 뭔가 해내게 해주어야겠다는 의지까지 생기면 이제 잠은 다 깬 거다.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면 나도 아이들의 놀이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고생한 만큼 아이들도 성장한다는 점에서 나도 함께 수고로워야 보물을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이 숨겨둔 보물은 무척이나 찾기 쉽다. 종종 한 곳에 보물 여러 개를 뭉텅이로 숨겨둔다. 그걸 보면 열 받을 때가 있다. 어른이라면 무성의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이들에게 왜 더 찾기 어려운 곳에 하나씩 나눠서 숨겨야 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이들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싶으면 아빠가 이렇게 누워있을 짬밥이 아니라는 마음이 퍼뜩 든다.        


[쉬운 길은 없고 좋은 길만 있다]

사실 피곤할 때 놀아줄 거리를 찾는 일은 그저 미련에 불과하다. 적당히 놀아주려면 아이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열심히 놀아주면 잠에서 깨게 된다. 아빠는 그런 아이러니 앞에 서 있다. 그런데 진짜 휴식은 열심히 놀아준 다음에 찾아오는 것 같다. 한바탕 재미있게 놀아주면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놀이에 빠진다. 앞선 놀이의 재미와 혼자 몰입하여 노는 시간이 비례한다는 것을 자주 체감한다. 그제야 잠시 누워 몸을 충전한다. 아무런 방해 없이 말이다. 그럴 때마다 육아는 날로 먹는 게 없단 생각이 든다. 고된 것들을 버텨야만 당연한 것들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육아 역시 인생의 논리와 함께 간다.     


그러니 아이들과의 놀이를 수면제로 쓰지 말고 각성제로 쓰겠다는 마음을 먹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놀이의 이치를 헤아려볼수록 각성 효과가 잘 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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