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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Sep 23. 2017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키운다는 것

'노 키즈 존'에 대해 드는 생각들

[등원]

첫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국공립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되자 무척 기뻤다. 예전에 한 번 와봤을 때는 큰 건물과 많은 방이 초등학교 같아 보여 부담스러웠다. 이 작은 아이가 이런 거대한 시스템에 벌써 들어가서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4살일 때는 국공립이 아닐 바에야 최대한 작은 어린이집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불과 1년 후에 와서 보니 큰 건물에 상응하는 좋은 환경이 눈에 보였다. 담임선생님을 비롯해 보조 교사와 양호 교사까지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안정성이 높아 보였다. 선생님들의 느낌도 조금 더 여유 있어 보였고 그만큼 아이들에게 집중해줄 것 같았다.     


[주차 전쟁]

등 하원을 며칠 해보니 불편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주차 공간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 아이들이 오가는 시간이 몰려 있기도 하고 차량의 도착 시각을 예측할 수 없으니 주차 공간이 부족할 때가 꽤 있었다. 급해서 몇 번 어린이집 바로 앞에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왔는데, 어느 날 차에 주차 단속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출퇴근 시간에 동네가 혼잡해지자 인근 주민들이 꾸준히 민원을 넣었고 결국 나에게도 단속을 맞는 날이 와버렸다. 이해하자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좀 속상했다. 인근 상가 앞에 하는 불법 주차와는 뭔가 다르지 않나 싶었다.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주민들 입장은 이해하지만 민원을 해결하고자 무차별적으로 단속을 하는 건 공무 수행에 있어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인구 절벽이라고 해서 나라가 출산과 양육을 절박하게 강조하는 요즘 같을 때에 조금만 더 배려해 줄 수 없는지 물었다. 어린이집 등 하원용 차량은 해당 지역의 단속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지나친 혜택이면 집중 등 하원 시간 각각 1~2시간만 단속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 공터에 주차 가능 칸들을 만들어 선 밖으로 주차를 하는 차량은 확실히 단속해서 실제 교통 혼잡을 일으키지 않도록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도 있다. 부모들은 바쁜 출퇴근 시간에 덜 수고롭게 어린이집을 오갈 수 있고, 주민들의 불만도 해소할 수 있으니 방법도 찾으면 있으리라 봤다.     


[다른 길]

그런데 구청은 수시 단속에 피로감이 더해지자 아예 그 지역 일대가 잘 보이는 곳에 고정식 CCTV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등 하원 각각 30분씩 미단속 시간을 설정하는 것으로 어린이집에 대한 배려를 마쳤다. 하지만 집마다 사정이 달라 등 하원 시간이 다르니 혜택을 받는 집은 정해져 있고 그 외 사람들은 다시 단속에 노출된다.    

한편 어린이집 앞 공터의 한 부분은 나무에 가려 CCTV가 단속을 할 수 없었다. 단속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에 나무와 벤치가 들어섰다. 우리 동네는 서울이지만 산이 많아 나무도 많다. 그곳에 거대한 화분(?)에 담긴 나무를 두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렇구나. 공무원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구나...’    


같은 공간에서 누구는 단속하고 옆에 누구는 왜 단속 안 하냐는 불만이 무서운 것이다. 행정적으로는 완벽한 규제 시행이 공무원의 목표였다. 그 과정에서 정작 주민들 요구를 최대한으로 맞추려는 노력은 뒷전이다 싶었다. 이런 디테일한 손길을 행정의 주목적을 이루는데 뻗어야 할 것 아닌가? 그저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부모들에게 적절한 배려를 해주고 나머지는 단속을 강화할 수 있었는데 애를 다른데 쓰고 있었다. 지켜보자니 답답했다. 어린이집 앞 도로 위에 적힌 어린이 보호 구역 사인이 무색하다.     


[또 다른 불만]

날이 점점 따뜻해졌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데 언제부터인지 차가 너무 많아 공간이 부족했다. ‘역시 부적절한 규제로 주차 공간은 여전히 비좁기만 하구나. 조금 더 강경하게 개선을 요청 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차를 빼는 사람이 없다. 선생님을 만나서 상담을 하거나 아이가 화장실을 간다고 해서 기다릴 수 있지만 대부분 차들이 미동도 하지 않는 건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오후에 그런 현상이 더 심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출근 때에 비해 차가 몰리는 정도가 덜 심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하원을 할 때 지나는 작은 놀이터가 있는데 거기 아이들이 북적였고 그 주변으로 학부모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 차를 안 빼고 있었던 거다. 이번에는 학부모에게 화가 났다. 내가 민원까지 넣어가며 주차 공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데 공간이 뻔히 부족한 것을 알면 바로바로 차를 빼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신입 입장이라 일단 관망해야겠다 싶어 어린이집에 불만을 제기하는 건 미뤄두었다.


[아이를 아이로 보라]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들 녀석이 나오면서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다 가고 싶다고 한다. 단호하게 말했다. 밖에 차를 바로 빼주어야 해서 안 된다고. 아이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실랑이가 길어지고 가만히 앉아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아이의 눈은 놀이터를 향해 있다.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아이에게 아주 조금만 놀고 그다음엔 바로 떠나자고 했는데 뭔가 자기 기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이는 집에 갈 줄 모르고 나 혼자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한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제야 학부모 손에 다들 핸드폰을 들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급히 빼야 하는 차가 있으면 바로 전화를 받기 위해서다. 주차 공간과 붙어 있는 입구에는 엄마들이 여럿 서 있다. 어찌 보면 불안한 것도 같은데 달리 보면 의연한 것도 같다.     


‘그렇구나. 이곳의 룰은 사회의 룰과는 좀 다른 게 있구나...’     


사회가 핵가족화 되고 저출산 현상이 심해지면서 출산, 양육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짧은 한순간만 겪게 되는 일이 되었다. 전에는 형-누나-오빠-언니로, 또 이모-삼촌으로 다른 사람의 ‘결정적 시기’를 간접 경험하고 학습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평생 그 방면에는 담을 쌓고 살다 어느 순간 직면한다. 사전 학습이 없다는 건 인생의 많은 시간 동안 육아 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는 어른보다 더 많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이 아닌 가슴으로 알기 위해선 아이와의 접촉면이 많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 키우는 부모는 제 아이만 위하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저출산 시대 아이의 위치]

앞으로 세월이 더 흐르면 아이가 있는 집은 열 가구 당 하나로 줄어든다고 한다. 인생의 한순간이라도 경험하면 다행이겠지만 이제 비혼과 출산 기피가 더욱 확대되면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의 ‘무지막지한’ 요구를 들어주는 건 더 눈치 보이는 일이 될 거다. 공감할 수 없으면 배려도 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웃집 사는 한 엄마가 카페에 갔는데 아이가 큰 소리로 우니, 옆에 앉은 대학생 커플이 보면서 ‘아이 짜증 나...’하며 큰소리로 화를 냈다는 거다. 엄마가 ‘학생 그렇게 대놓고 짜증 난다고 하는 건 예의가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니 학생들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키워요...’라는 답이 돌아왔단다.   

  

그 학생들이 아이의 생리를 잘 몰라줘 안타깝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식당에서 떠드는 아이들 보면 부모가 가정교육을 안 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이에게 윽박지른다고 말을 들을 것도 아니고 호된 훈육만으로 아이들을 바르게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울 땐 울게 하면서 멈출 것을 지적하고 스스로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정석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려면 신속한 ‘진압’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제는 남의 아이가 울어도 좀 기다려줘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런데 이런 공감대가 점점 부족해진다면 양육 환경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는 시선에서 아이는 못난 어른과 다른 바 없다. 한심한 성인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질책을 들으면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간 자기 아이만 위하려는 부모들의 이기심이라는 것도 존재했다. 그래서 그것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버릇없는 아이만 키우게 된다는 우려도 컸다. 하지만 아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좋은 육아 환경을 바라긴 난망하다.      


[노 키즈 존이 아니라 노 키즈 시대가 문제]

결국 ‘아이의 세계를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그 공감대가 얼마나 두텁고 넓은가’에 답이 있다. 나 역시 노 키즈 존에 찬성한다. 진심으로 평온이 필요한 이들에게까지 내 아이가 피우는 소란을 참아달라고 하고 싶지 않다. 나도 식당에 들어가면 아이 있는 테이블에서 먼 곳을 찾곤 한다. 아이들을 어렵게 집에 두고 나왔는데 옆 테이블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면 좀 손해를 보는 기분까지 든다. 진정으로 차분한 시간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도 헤아려주고 싶다. 그래서 그런 공간을 선언한 식당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손님은 받지 않겠다는 손해도 스스로 감수한 거다. 대화 없이 조용히 머물러야 하는 카페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런 공간 자체의 존재 여부로 논쟁을 할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 줄어들수록 노 키즈 존은 더 늘어갈 것이고 그러면 애 키우는 사람들이 갈 곳은 더 없어질 거란 거다. 노 키즈 존은 노 키즈 인구에 비례하여 늘어나지 않을까?    


나는 아이와 아이 키우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배려가 주어지길 기대하며 그런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며 그래서 아이에게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그를 위해 더 많은 인내와 배려가 주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길 바란다. 이런 생각이 차별, 특권이라는 비판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기를 더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공감대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까? 그럼 정말 딱 필요한 만큼만 노키즈 존이 남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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